스포츠 유산을 다시 생각하기
들어가는 말
스포츠사학자들은 스포츠 유물과 유적에 관심을 가진다. 필자는 1996년 <체육과 스포츠 유물의 보존과 전시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로 국제스포츠과학학술대회에서 발표하면서, 서울올림픽기념관에 전시된 1988 서울올림픽의 각종 물품 중 태권도복에 곰팡이가 피어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경험이 있다. 2008년에는 박사학위논문을 지도하면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의 각종 공문서가 생산, 유통, 보존, 폐기되는 과정이 특정지침서에 따라 적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한 적도 있다. 그리고 2011년 문화재청의 과제인 <근대문화유산 체육분야 목록화 조사>를 수행하면서 태릉선수촌의 한국체육박물관에 있는 스포츠 유물이 너무나도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음에 놀랐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스포츠의 산실인 서울운동장과 태릉선수촌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자괴감이 들어 매우 슬펐다.
스포츠 유산의 의미
부모가 죽으면 돈이나 집 등을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기곤 한다. 이때 ‘유산’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legacy와 heritage가 쓰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 조선 왕릉, 석굴암과 불국사 등은 heritage를 사용한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IOC)에서는 legacy를 사용한다.
어원적으로는 두 단어 모두 후대에 남긴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일반적으로 남긴 사람이 개인이면 legacy, 조상, 인류 등 집단이면 heritage를 쓴다. 재산이나 법, 제도 같은 것이면 legacy, 문화적인 것은 heritage이지만 엄격하게 구분하기는 힘들다. 개인이나 집단의 업적이 유산으로 남겨져 후세에 그것이 모두가 기념될 만한 수준으로 높아졌을 때 heritage를 쓰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현재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는 올림픽을 legacy로 사용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올림픽은 heritage로 기억될 것이다.
이수연(2015)은 스포츠 유산을 “운동경기, 야외 운동 등의 신체활동이나 놀이 그리고 사회·문화적 현상과 관련하여 과거로부터 물려받아 현재 우리가 공유하고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는 유·무형의 모든 것”이라고 하면서 문화유산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스포츠사회학자들은 보전가치(국제적, 역사적, 예술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적)가 활용가치(경제적, 학술적, 교육적, 도시맥락적)에 비해 1.5배 정도의 중요도를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1984 LA올림픽 이후 올림픽 유치는 엄청나게 수지가 남는 장사였다. 그러나 유럽을 중심으로 올림픽 유치도시에서는 엄청난 시설투자에 비해 피해가 많다고 생각하면서 올림픽 유치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동계올림픽 유치도시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2 런던올림픽 이후부터 올림픽 유산(legacy)이란 말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런던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는 올림픽공원지역을 사업구역과 새로운 유산구역으로 나누어 회사(London Legacy Development Corporation/LLDC)를 설립하였고, 올림픽의 시작단계부터 사후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논의하였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올림픽 유산의 계획, 실행, 성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과정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틀을 개발하기도 하였다(임태성·박재우, 2015).
국제올림픽위원회는 2009년 유엔(United Nation/UN, 국제연합)의 옵서버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 후 2014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MOU를 맺어 올림픽 운동이 스포츠를 통해 청소년들을 교육함으로써 평화롭고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목표를 약속하였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유엔, 유네스코와 손을 잡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스포츠를 통하여 청소년과 여성의 지위를 강화하고, 평화 구축과 지역사회 대화에 앞장서며, 인류의 건강한 삶을 홍보하였다.
국제올림픽위원회(2013)에서 말하는 올림픽 유산은 올림픽이 열리는 그 도시와 국가의 유·무형의 자산으로 스포츠 그 자체와 사회, 환경, 도시 및 경제분야 등 5가지로 나뉜다. 그동안 시설 중심의 legacy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스포츠 유산은 스포츠문화, 관습, 전통 등 heritage로서의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 스포츠의 성지는 어디인가?
근대 올림픽의 성지는 고대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 올림피아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스포츠의 성지는 동대문에 있었던 서울운동장인가? 1988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인가? 2002 한일월드컵이 열렸던 서울월드컵경기장일까? 아니면 태릉선수촌일까? 쉽게 답하기 어렵다. 서울운동장은 동대문디자인 플라자로 바뀌었고, 태릉선수촌은 진천으로 옮겨졌다. 우리는 우리의 스포츠 유산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성화봉송은 고대 그리스에서 실시되었던 것에서 영감을 얻은 창조된 발명품이다. 올림픽의 시작을 알리는 올림픽 성화봉송은 경로를 지나는 동안 평화와 우정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러한 성화봉송은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이후에도 올림픽 성화는 언제나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채화(採火)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화봉송은 1955년에 개최된 제36회 전국체전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당시 한국국제올림픽 이상백 위원의 제의로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성화를 채화하였고, 성화봉송의 최종주자인 마라톤 손기정 선수가 이어받아 서울운동장까지 봉송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하는 종교의례의 성지일 뿐이다. 따라서 참성단에서 채화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일체화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일부 종교인들이 반대하고 있고, 스포츠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문제이다.
이번 제103회 전국체전이 열린 울산에는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단군보다 더 오래되었고, 스포츠사적으로도 그리스 올림피아보다 오래된 역사·문화유적지이다. 1971년에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약 7,000년에서 3,600년 전인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고래잡이 포경유적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평가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국보 제285호이다. 이 암각화에는 고래를 사냥하는 모습과 함께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활 쏘는 사냥꾼의 모습이 대략 3개 정도 보인다. 반구대 암각화 우측 하단 부분에 위치한 활을 들고 사냥하는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스포츠란 말은 원래 고대 프랑스어 desport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간이 재미있고 즐겁게 여기는 모든 것’으로 놀이와 여가로서 사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반구대 암각화와 그 주변 지역은 올림픽이 열린 그리스의 올림피아와 같은 수준의 스포츠 유산으로 성역화하고, 성화를 채화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태릉선수촌을 태릉무예촌으로
2009년 조선 왕릉 40기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에 문화재청이 태릉과 강릉 사이에 있는 태릉선수촌을 철거하고 조선 왕릉의 원형을 복원시키겠다고 나서 현재는 태릉선수촌의 시설 대부분이 철거되었고,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도 곧 이전할 계획이다.
태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핵심지역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강릉·태릉을 도굴하려는 것을 막은 수호군(守護軍)의 기록이 있다. 태릉지역은 남성 위주의 무세(武勢)가 강한 곳으로 조선시대의 강무장(講武場)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육군훈련소로 사용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인 남조선국방경비대와 육군사관학교가 자리한 전통무예 공간이면서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하는 태릉선수촌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국민적 관심이 많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했던 태릉선수촌은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대표적인 스포츠 유산이다.
태릉선수촌 부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의 복원과 함께 대한체육회 종목단체이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인 택견(제76호), 씨름(제131호) 및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인 활쏘기(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 준비) 등의 문화재 보존단체들이 왕릉을 보호하는 수호군의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면, 문화재청과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체육회가 다 함께 상생할 수 있지 않을까? 추후 이곳을 유네스코 문화유산단지로 조성하여, 조선 왕릉을 보존함과 동시에 왕릉 행차에 수반되었던 ‘관사(觀射: 활쏘기)’와 ‘열무(閱武: 무예)’ 등을 재현시키고, 이곳에서 씨름, 택견, 활쏘기 등의 전통무예를 전승하고 보전하며 나아가 관광상품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태릉무예촌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형 스포츠클럽의 원조 ‘전통 활터’
2005년부터 시작한 ‘한국형 스포츠클럽 육성사업’이 결실을 맺어 2021년 「스포츠클럽법」으로 탄생하였다. 그동안 한국형 스포츠클럽은 17년 동안 각종 시범사업을 실시하면서, 지역스포츠클럽, 학교스포츠클럽, 공공스포츠클럽, 종합형 스포츠클럽, 거점형 스포츠클럽 등의 사업이 진행되었다. 주로 스포츠선진국인 독일과 일본을 벤치마킹한 형태인데, 사실 우리나라 전통 활터는 수백 년을 지속한 곳이 많이 있다. 조선시대부터 지속된 한국형 스포츠클럽은 역사적으로는 오로지 전통 활터뿐이고, 100년 이상 된 곳이 약 50곳이다. 역사적 자료가 미비한 곳이 많이 있지만 대략 20여 곳은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를 지닌 건물과 현판, 회원명부, 각종 대회기록 등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이에 대해서는 문화체육관광부보다는 문화재청 산하 민속박물관에서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필자가 수행한 서울특별시의 <국궁발전 종합계획수립(2021)> 용역 보고서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이러한 100년 이상 된 활터의 건물과 회칙, 대회기록 등은 우리나라 스포츠클럽의 산 역사이며 소중한 스포츠 유산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양궁은 올림픽에서만 43개(금 27, 은 9, 동 7)의 메달을 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목이다. 그런데 양궁이 서울의 남산에 있는 석호정이라는 전통 활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적다. 우리는 올림픽메달 개수만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런 것도 기억해야 되지 않을까?
나가는 말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에 ‘스포츠유산과’가 만들어졌다. 올림픽 등 국제스포츠경기대회를 통해 창출된 유산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발전시키는 태권도 세계화 및 진흥을 위한 조직으로 태동하였다. 하지만 2022년에는 스포츠유산과를 없애고, 한시적으로 ‘스포츠유산팀’을 신설하였다. 현재 업무는 국제스포츠 경기대회 시설 사후활용 등 스포츠 유산 창출 정책의 수립 및 지원을 비롯하여 동계올림픽특구사업과 6개의 태권도 진흥 사업이 주를 이루고 있고, 전통무예 진흥 계획의 수립·시행 및 관련 단체의 육성·지원이 포함되어 있다. 스포츠 유산에는 수많은 영역이 있을 터인데, 너무 국제스포츠경기대회 시설 활용과 태권도 진흥에만 매달린 경향이 있어 아쉬울 따름이다.
2024년에 개관할 국립체육박물관을 비롯하여 한국체육박물관, 서울올림픽기념관,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기념관, 2002 FIFA월드컵기념관, 야구박물관, 말박물관, 국립태권도박물관, 국립산악박물관, 대관령스키역사박물관, 골프박물관, 충주세계무술박물관, 손기정기념관 등 수많은 스포츠박물관이 있는데, 이들 기관은 스포츠 유산으로서 다양한 스포츠 유물과 기록 등을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협의체를 구성하여 이들을 통한 스포츠 유산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스포츠 유물과 관련된 스포츠 유산에 대한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동·하계올림픽 및 패럴림픽, FIFA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제스포츠경기대회를 유치하고 개최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스포츠 유산의 활용을 위한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 유산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서 후대에까지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오래된 미래’이다.
*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이 발행하는 <스포츠 현안과 진단> 기고문 입니다.
* 이번 호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과학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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