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과 악몽 사이 어딘가에 선, 전박찬의 ‘맥베스’[인터뷰]
“첫 셰익스피어 연기, 극중 대사처럼 축복이면서 악몽”
수원 경기아트센터에서 13일까지 맥베스>
전박찬(40)은 무대가 끝난 뒤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지닌 배우다. 강렬한 연기로 지금까지도 관객들에게 회자되는 <에쿠우스>(2014·2018)의 소년 알런, 기묘할 정도로 차분했던 <맨 끝줄 소년>(2015·2017·2019)의 클라우디오를 비롯,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소설가를 꿈꿨던 <썬샤인의 전사들>(2016)의 소년병 나선호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그가 첫 셰익스피어 연기에 도전했다.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 포스터 속 부릅뜬 눈과 잔뜩 일그러진 얼굴. 전박찬의 ‘맥베스’다. 그는 한태숙 예술감독이 이끄는 경기도극단의 연극 <맥베스>의 타이틀롤 맥베스를 맡아 수원 경기아트센터 무대(11월3~13일)에 오르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비극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그가 빚어낸 ‘맥베스’는 보통 그려지는 맥베스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순수와 악이 공존하는 얼굴, 투명한 백지와 같은 내면이 욕망과 만났을 때 더 또렷해지는 냉혹한 폭력성을 그는 핏빛의 무대 위에 그려낸다.
지난 6일 나흘차 공연을 마친 전박찬은 “맥베스의 대사 중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 어린 말들이고, 환희이면서 동시에 악몽 같은 환영’이라는 대사가 있는데, 맥베스를 연기하는 것 역시 저에게 큰 축복이면서 악몽 같기도 하다”며 “여전히 두려운 마음으로 공연에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한태숙 연출과 2020년 연극 <대신목자>로 호흡을 맞췄던 전박찬은 처음 이 배역을 제안받고 놀랐다고 한다. 관객에게 짙은 인상을 남긴 여러 작품 속 소년과 청년의 이미지를 뒤로하고 그가 어떤 ‘전사’의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증을 낳기도 했다.
“대학에서 셰익스피어 수업을 들은 적은 있지만, 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어요. 30대 후반을 지나며 셰익스피어 작품을 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사실 맥베스가 상상되지는 않았어요. 맥베스라는 장군 역할은 저보다는 훨씬 체구가 크고, 남성적인 배우들의 영역으로 여겼던 것 같아요. 한태숙 연출님과 예전에도 작업을 했었기 때문에, 저라는 배우를 택한 어떤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를 다 제거해버리고 이 인물을 연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관객들이 기대하는 맥베스의 모습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연습 기간 내내 고민이 많았습니다. 연출님이 ‘징글징글한 인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하시더라고요. 딱 보기에도 장군 같은 사람이 싸우는 게 아니라, 체구도 작고 장군 같지도 않은 사람이 탈진할 때까지 싸우는 모습에서 관객들이 무엇을 느끼고 가져갈 수 있을까를 지금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연극은 중세 스코틀랜드가 아닌 현대의 전쟁터로 이야기를 옮겨 온다. 헬리콥터와 총소리가 울리는 무대는 타락한 군인들의 세계다. 사람들은 약에 취해 비틀거리며 어떤 윤리도 도덕도 없이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무대 한편에 놓였다가 공연 말미 무대 전체를 빼곡하게 뒤덮는 관은 이 연극의 지배적 이미지인 죽음, 욕망의 덧없음을 드러낸다. 전박찬은 “연습 과정에서 배경을 현대로 옮겼을 때 정확히 어느 시점으로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지난한 논쟁이 있었다”며 “결국 명확하게 특정하지 않은 어떤 시기가 나왔는데, 관객들이 공연에서 근미래를 떠올릴 수도 있고, 가까운 전쟁이나 혹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떠올리기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흩어진 관들이 끝내는 마녀들이 예언한 던시네인 숲이 되어 빽빽한 나무처럼 무대 위에 서면, 욕망과 광기로 질주하던 맥베스는 죽음을 맞는다. 공연은 원작과 달리 악인의 처단과 그로 인한 정의의 회복이 아닌, 연쇄적인 총성으로 끊임없이 대물림되는 폭력의 역사를 드러내 보인다. 모든 배우들이 각자의 관을 어루만지는 마지막 장면과 이 애도의 몸짓들 사이로 겹쳐지는 맥베스의 독백은 죽은 이들을 위한 비가처럼 들린다. 전박찬은 “원작 속에서 맥베스의 마지막 대사는 ‘덤벼라 맥더프!’인데, 그 대목이 너무나 덧없게 느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모든 배우들이 무거운 나무 관을 들고 와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데, 어느날 그 장면을 연습하다가 어느 순간 연극도 삶도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누군가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는 이 판국에서,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하는 맥베스의 그 지독함만으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맥베스가 죽은 뒤에 뱉는 마지막 독백은 원작에선 레이디 맥베스의 죽음 이후 나오는 대사에요. 무대 위에 등장할 동안 뽐내고 안달하지만 지나고 나면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하찮은 배우이며, 인생도 그렇다는 것…. 그 마지막 대사를 어떤 비애나 다른 감정 없이 덤덤하게 이야기할 때, 관객들에게 각자의 해석과 감정의 여지를 더 남기는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어떤 애도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전박찬은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연극은 완전히 바뀌었다”며 어느 작품에서든 누군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늘 두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타인의 고통을 무대 위에 올리면서도 그것을 섣부르게 재현하거나 타자화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가 선택해온 작품들이 사회적 고통을 줄곧 증언하는 무대였기에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 고 김동현 연출의 <말들의 무덤>(2013)은 구술 기록 등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양민학살을 무대 위에서 ‘재연’하는 문제작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제 연극의 시작”이라고 꼽는다.
10년 가까이 몸담았던 극단 ‘코끼리만보’를 떠나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에서 한 작업들도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예술과 아름다움은 가능한가를 묻는 작품 <셰익스피어 소네트>(2018), 군 의문사와 삼성 백혈병 사망사건을 다룬 <7번 국도>(2019),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은 <우리는 농담이(아니)야>(2020) 등이 그랬다. 전박찬은 “고통의 당사자가 존재하는 이야기를 할 때,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습 과정에서 그 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민하다 보면 작은 오솔길 하나가 보인다’고 동료인 이리 배우가 말했어요. <7번 국도>를 할 때는 공연 내도록 서서 말만 했습니다. 그 방법밖에는 없었어요. 이 이야기의 당사자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극 속 인물을 매력적으로 캐릭터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래서 전박찬이라는 배우가 연기 잘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또 뭐하겠어요.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소극장 공연인데도 대극장에서 쓸 법한 질러대는 발성으로 대사를 했는데, 그건 절대 이 말들을 일상적인 차원의 대화 또는 발화로 떨어뜨릴 수 없다는 고민의 결과였습니다. 혜화동 1번지 기획초청작이었던 <셰익스피어 소네트>는 저에겐 하나의 변곡점이 됐던 작품이에요. 그전에도 세월호 참사에 대한 공연을 제안받았지만 번번이 거절했어요. 제가 감당할 수 없었고 제가 목소리를 내기엔 너무나 큰 일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이 작품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네 명의 배우가 다리를 오들오들 떨면서 공연했어요. 평소 그런 배우들이 아닌데, 그만큼 무섭고 무거울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전박찬은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다층적으로 제게 들어오는 질문들에 대해 창작자로서 고민하고, 그런 질문이 명확한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는 작업은 제게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연극은 결국 관객과 함께 답을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창작자들이 고민했던 것을 관객들이 그대로 봐주시기도, 우리가 미처 찾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해내기도 하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동시대적인 질문들도,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 분들이 훌륭한 답을 찾아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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