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 신종자본증권 예정대로 상환…금융당국이 사실상 유동성 지원
기사내용 요약
금융사 전체로 위기 확산하자, 당국이 유동성 지원 물밑 작업
시중은행·대형보험사, RP 5000억원 매입하기로
600억은 흥국이 자체 충당…태광그룹 증자 있을 듯
RP 매입에 은행권 반발…"흥국생명 채권 왜 사줘야하나"
금융당국 책임론도…보험권 "RBC비율 완화해줬으면 될 일"
[서울=뉴시스] 남정현 최홍 기자 = 흥국생명이 9일 예정된 5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중도상환(콜옵션 행사)한다. 이 회사가 이례적으로 해당 증권의 콜옵션을 미행사하고 표면금리 인상(스텝업)을 선택하면서 국내 금융사의 외화 차입 여건이 급속히 악화됐다. 이에 금융당국이 뒤늦게 이를 수습하기 위해 유동성 지원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흥국생명은 환매조건부채권(RP) 발행과 자체 유동자금으로 총 5600억원을 조달하는 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대주주인 태광그룹과 계열사들의 출자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8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전날 오후 5시48분 싱가포르거래소에 2017년 11월 발행한 5억 달러(발행 당시 약 5571억원) 규모의 해외 신종자본증권에 대한 콜옵션을 행사하겠다고 재공시했다. 이번에 상환하는 5억 달러는 현재 환율로 7000억여원이지만, 해당 증권을 발행할 당시 콜옵션 환율을 행사 시점이 아닌 발행 시점으로 적용하기로 계약하는 환헤지를 했기 때문에 필요한 자금은 발행 당시 환율 기준인 5600억원이라고 흥국생명은 설명했다.
흥국생명은 이번 결정에 대해 "최근 조기상환 연기에 따른 금융 시장 혼란을 잠재우기 위함"이라며 "(모회사인) 태광그룹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본확충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흥국생명은 보유 중인 국채 등을 담보로 RP를 발행해 약 5000억원을 조달한다. 시중은행들이 4000억원, 삼성생명과 한화생명 등 대형 생보사들이 1000억원가량 자본 조달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600억원은 흥국생명이 자체 유동자금으로 충당할 예정이다.
흥국생명, 유동성 좋은 편 아냐…모기업 태광그룹 유상증자 전망
지난 2분기 기준 흥국생명의 자기자본은 1조9718억원이고 RBC 비율상 가용자본은 2조7734억원었지만, 현금및현금성자산은 3917억원에 불과했다. 전기말(6572억원)과 비교해 2655억원이나 감소했는데 이 수치는 금리인상 등의 여파로 최근 더 악화됐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흥국생명의 유동성비율은 올 3월 기준 89.8%로, 같은 기간 생보사 평균 유동성비율인 206.5%을 크게 하회했다. 6월 말 기준 103%으로 개선됐지만 여전히 업계 평균보단 낮은 수준에 그쳤다. 유동성비율은 기업의 현금 동원 능력을 판단하는 지표로, 재무구조 안정성을 측정하는 비율로 사용된다. 유동자산을 유동부채로 나눈 값이다. 유동성비율이 높을수록 기업의 단기지급능력은 좋다고 볼 수 있는데 통상 200%가 적정선으로 여겨진다.
수지차비율 역시 3월 말 기준 7.8%를 기록하며 업계평균(44.1%)을 크게 하회했다. 수지차비율은 보험사가 별도의 외부 자금차입 없이도 정상적으로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는 적정한 유동성을 가지고 있는지 측정하는 지표다. 즉 이 수치는 보험·투자·기타손익 등의 보험영업과 자금운용상 현금유입이 지급보험금 총액의 7.8%밖에 되지 않음을 뜻하며, 업계 평균보다 보험금 지급 여력이 매우 낮다는 의미다.
앞서 흥국생명은 9월7일 이사회를 열고 조기상환 자금 마련을 위한 신종자본증권 발행을 결정하고 이를 추진했지만, 발행 여건이 어려워지자 콜옵션 행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지난달 31일 결정을 철회했다. 흥국생명은 지난 1일 공시를 통해 "'보험업법'에 따른 발행회사의 지급여력비율을 제고하기 위함이며, 조달자금은 발행회사의 채무상환자금(재무건전성 관리 용도)의 자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후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 사태가 국내외 금융시장에 미치는 후폭풍은 거셌다. 국내 금융기관의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이 연기된 것은 2009년 우리은행 후순위채 이후 13년 만이었다. 그만큼 다른 보험사와 은행의 신종자본증권 가격도 동반 하락하는 등 금융시장에 미친 충격파도 컸다.
실리 챙긴 흥국생명…당국, 물밑에서 조율했나
금융권 관계자는 "전 세계 신용 스프레드 시장이 안 좋아지다가 최근 잠잠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레고랜드 ABCP와 흥국생명 콜옵션 문제로 CDS 프리미엄이 급등하고 있다"며 "당국 입장에서는 최대한 국내 시장의 불확실성을 없애야 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금융당국이 은행과 보험사를 동원해 흥국생명에 특혜를 제공한 모습이 됐다.
흥국생명 입장에서는 콜옵션을 이행하든, 하지 않든 금리 부담이 예정된 상태였다. 콜옵션을 미이행하면 연 4.475%인 금리가 연 6.742% 수준으로 오른다. 콜옵션을 행사해 차환할 경우에도 연 12%를 넘는 금리를 감당해야 한다.
반면 은행의 RP 매입으로 자금을 조달하면 더 싼 금리를 적용할 수 있다. RP는 단기 채권이기 때문에 장기채권에 속하는 신종자본증권보다 금리가 낮다. 이 때문에 은행권 일각에서는 불만이 새어 나오고 있다. 흥국생명의 RP를 매입할 합리적인 유인이 없는데도 어쩔 수 없이 동원됐다는 입장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갑자기 예정돼 있지 않은 돈을 채워야 하므로 은행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권 관계자는 "RP 채권을 사면 다른 회사도 많은데 왜 굳이 흥국생명 채권을 사줘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솔직히 RP 매입보다 수익률 좋은 자금운용 방안도 많다"고 밝혔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당초 금융당국이 흥국생명의 콜옵션 이행을 위해 RBC(지급여력) 비율 기준인 150%를 일시적으로 완화해 시장의 불확실성을 잠재웠어야 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보험업권 관계자는 "흥국생명이 콜옵션 이행을 꺼렸던 이유는 RBC비율 하락 때문"이라며 "당국이 일시적으로 RBC 비율 기준을 완화해줬으면, 외화채권 시장의 불확실성과 은행·보험사의 지원도 필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융당국 관계자는 "협의는 하고 있지만 최종 결정은 항상 흥국생명이 하는 것"이라며 "당국도 시장 상황을 면밀히 보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흥국생명 콜옵션 관련 금융당국의 대응이 미흡했다는 의원들이 지적이 쏟아졌다.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흥국생명이 콜옵션 행사를 안 하기로 했고 금융당국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며 "그런데 전날 흥국생명이 다시 콜옵션을 행사하기로 하면서 금융당국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이 사안에 대해 이해력과 대처를 종합적으로 가졌는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금 전 경제 분야에서 언제 어디서 돌발적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대응이 늦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며 "흥국생명 건은 대주주가 증자하기로 했고, 콜옵션도 원래대로 발행하기로 했다. 수습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답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nam_jh@newsis.com, hog8888@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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