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인권이사국 충격 낙선… 아시아의 '각자도생'에 치였다 [문지방]
후보국 미리 조율해 본선 나와 탈락자 無
인종·종교·경제수준 천차만별인 아시아는
사전조율 불가능한 구조…견제도 심해져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한국, 유엔 인권이사국 낙선.'
지난달 중순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인권이사국이 출범한 2006년 이후 한국이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건 처음입니다. 더구나 한국을 제치고 이사국에 선출된 국가의 면면을 보면 자괴감이 더 커지는 게 사실입니다. 방글라데시(160표), 몰디브(154표), 베트남(145표), 키르기스스탄(126표)이 당선됐는데 선뜻 인권 모범국으로 보기 힘든,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나라에 밀린 거니까요. 이들이 아시아 국가에 배분된 4석을 차지하면서 123표를 얻은 한국은 5위로 아쉽게 고배를 마셨습니다.
여야는 남탓... 외교부는 "득표력 분산이 패인"
여권에선 곧바로 ‘문재인 정부 책임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북한 눈치를 보느라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에 불참한 것이 악영향을 끼쳤다는 겁니다. 실제 전임 정부는 집권 중반기인 2019년부터 3년간 남북관계 등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불참했습니다.
야당은 곧장 반박했습니다. '비속어 논란'을 비롯한 윤석열 정부의 외교 실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다만 양측 모두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인권이사국 선출은 자격심사가 아닌, 193개 유엔 회원국의 무기명 투표로만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야 하기보다는, 소위 '인기 투표'에 좌우된다는 뜻입니다.
주무 부처인 외교부는 ‘득표력 분산’을 패인으로 꼽았습니다. 올해 한국이 예년보다 많은 14개 국제기구 선거에 출마하면서 재외공관망을 중심으로 한 교섭력이 약화됐다는 겁니다. 의욕만 앞세우다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잘 뭉치는 EU·아프리카… '모래알' 아시아
다만 내부적으로는 아시아 대륙의 특성을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총 47개인 인권이사국 티켓은 대륙별로 배분되는데요. △아시아·태평양 54개국(13개) △아프리카 54개국(13개) △동유럽 23개국(6개) △서유럽·북미 29개국(7개) △중남미 33개국(8개)으로 나뉩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대륙 차원에서 사전조율을 거쳐 이미 후보를 정해 출마하는 유럽이나 아프리카와 달리 아시아는 아무런 협의과정 없이 '각자도생'으로 나선다는 겁니다. 자연히 본선 득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달 11일 선거 결과를 좀 더 살펴볼까요. 탈락한 국가는 아시아에 속한 한국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중남미 국가 베네수엘라뿐이었습니다. 아시아와 중남미를 제외한 나머지 대륙에서는 내부적으로 교통정리를 해서 후보를 선출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네 자리가 공석인 아프리카에선 알제리, 남아공, 수단, 모로코가 출마해 당선됐고, 각각 두 자리가 공석인 동유럽과 서유럽에선 조지아와 루마니아, 벨기에와 독일이 입후보해 선출됐습니다. 이들 대륙에서 탈락자는 없었습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유럽은 EU(유럽연합)를 중심으로, 아프리카는 AU(아프리카연합)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다 보니 국제기구 선거에 나갈 때도 내부적으로 순번을 정해 후보를 내기 때문에 탈락자가 나오지 않는다”라며 “그만큼 그 안에서 정보 공유가 잘 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인종과 경제 수준이 천차만별인 데다 이웃국가들 간에 사이마저 안 좋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내부 조율은 언감생심입니다. 54개국이 소속된 아시아·태평양 그룹에는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중동의 쿠웨이트, 레바논,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 종교와 역사적 배경이 제각각인 국가들이 한데 묶여 있습니다.
그로 인해 단합 수준이 ‘모래알’에 비유될 정도입니다. 2020년 인권이사국 선거에서도 유일한 탈락자가 사우디아라비아였는데 이 역시 아시아였습니다. 최근엔 중국이 이번 선거에 훼방을 놓았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지난달 6일 유엔 인권이사회가 47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신장 유엔 인권결의안 투표에서 우리나라가 찬성표를 행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중국이 낙선 운동을 벌이며 앙갚음했다는 것입니다. 아시아 국가들끼리 단합이 잘됐다면 이런 논란도 없었을 겁니다.
서구 위주로 짜인 '대륙 분포' 재조정 의견도
일각에선 서구에 유리하게 짜인 유엔의 '대륙 분포'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인구가 많고 영토가 가장 넓은 아시아·태평양을 한데 묶고 유럽은 두 개로 쪼개다 보니 대륙별로 돌아가는 국제회의 유치도 순번이 늦게 돌아와 불이익을 받기 때문인데요. 일례로 1995년부터 매년 열리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의 경우, 독일(서유럽)과 폴란드(동유럽)는 각각 세 차례나 치렀지만 유치를 희망하는 국가가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매번 내부 경쟁을 치열하게 합니다.
외교부에선 이번 낙선이 어느 정도 예견됐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은 왜 모든 선거에 나가려 하느냐”는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는 겁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언론 브리핑에서 “한국이 과다하게 주요 기구에 계속 진출하는 것 아니냐는 견제 심리도 일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는 인권이사회 출범 원년인 2006년부터 임기 만료로 3연임이 되는 때를 제외한 모든 회차에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이사국 임기는 3년으로 한 차례 연임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견제 심리가 거세진 데다 아시아 국가 내부 경쟁마저 치열해진 상태입니다.
국제기구 진출은 한국의 국력을 뽐내고 주요 현안에 목소리를 내면서 국제사회에 기여할 중요한 기회입니다. 이번 낙선을 계기로 정부 차원에서 선거 전략을 재정비할 필요성이 절실해보입니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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