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부 다이어리] 이 좋은 길 옆에 두고, 왜 안나푸르나만 찾을까
한 달간의 네팔 트레킹 후 이틀을 쉬었더니 몸이 근질거렸다. 지도를 보며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 도르파탄Dorpatan을 발견했다. 다르방Darbang에서 잘자라 패스Jaljala Pass(3,414m)를 넘어, 도르파탄을 지나 하돌포Low Dolpo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네팔에서도 오지에 속했지만 내게는 두려움보다 궁금함이 앞섰다. 지난 5년간의 히말라야에서 나는 몇 개월씩 새로운 길을 찾아다니곤 했다. 낯선 길이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포카라Pokhara에서 다르방까지 버스로 8시간이 걸렸다. 현지인들이 묵는 호텔에 갔더니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화장실에서는 수시로 가래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내 방문을 벌컥 열고 쳐다보는 할머니 때문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밥 먹을 때도 주변의 시선이 꽂혔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다르방에서 무나Muna까지 택시를 타기로 했다. 우리는 경차에 큰 짐을 2개나 싣고, 운전사를 포함해 4명이나 탔다. 꼬마 자동차는 뒤뚱뒤뚱 비포장도로를 힘겹게 올라갔다. 차가 멈추기라도 하면 포터 라전과 다와가 내려서 차를 밀었다. 차 바퀴가 헛돌 때마다 바닥에서 뽀얀 먼지가 올라왔다. 수동으로 창문을 올리기도 전에 차 안은 금세 먼지로 가득해졌다.
갑자기 나타난 설산에 깜짝 놀랐다. 다울라기리산군이었다. 다라파니Dharapani (1,560m)에서 택시를 세우고 사진을 찍으면서도 마음이 쓰렸다. 다음 마을인 시방Sibang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걸어야 할 길을 차를 타고 가다니, 이번 선택은 좋지 않았다. 사실 나는 여행을 시작할 때 관련 사진을 찾아보지 않는다. 가고 싶은 길이 결정되면 그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후회가 막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며칠 머물다 가도 좋을 곳인데 안타까웠다.
1시간 40분 만에 무나에 도착했다. 더는 식당이 없대서 오전 10시에 이른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라전과 다와는 현지인에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두 친구의 길을 찾는 능력은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탁월했다. 내가 낯선 길에서도 걱정하지 않는 이유였다. 길을 잃으면 잃는 대로 좋고, 현지인에게 물어서 가는 재미도 좋았다.
가는 동안 라전은 동네 아이와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걸었다. 뒷모습이 부녀지간처럼 보여서 괜히 내가 다 흐뭇했다. 룸숭Lumsung에서 쉬는 동안 다와가 주스를 사줬다. 보통은 내가 사는데 여러 날 같이 걷다 보니 포터들이 먼저 사주기도 했다.
모레니Moreni(2,275m)에는 홈스테이가 두 군데 있었다. 첫 번째 홈스테이에서 1시간쯤 가면 또 있대서 좀 더 가보기로 했다. 마지막 민가에서 다시 물어보니 어제 거기 홈스테이 주인이 죽었단다.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 집 마당에 텐트를 쳤다.
"라전, 저 산 이름이 뭐예요?"
"구르자 히말Gurja Himal(7,193m)이에요."
"구르자 히말이요?"
"네, 집주인이 구르자 히말이래요."
라전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이곳에 오기 직전 고故김창호 대장 일행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2018년 10월 그분들이 숨을 거둔 곳이 구르자 히말이라고 했을 때, 나는 그 산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구르자 히말이 잘 보이는 곳에 오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구르자 히말에서 죽은 네팔인 중에는 다와의 친구도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산은 저리도 평온한데….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길은 고도가 낮으면서 산을 몇 개씩 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백두대간처럼 말이다. 무나부터 하돌포로 이어지는 길이 그랬다. 아침부터 해발고도 1,000m를 올려야 해서 진땀을 뺐다. 현지인들은 2시간이면 된다고 했지만 우리는 어림도 없었다.
이번 여정을 계획하면서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길이 돌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잠시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다 입이 떡 벌어졌다. 다울라기리산군을 비롯해 구르자 히말이 무섭게 버티고 있었다. 저 멀리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얼굴을 들이민 것 같았다.
뒤따라오던 라전에게 뒤를 돌아보라고 했다. 그도 놀란 눈치였다. 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안나푸르나, 랑탕, 에베레스트 쪽이다 보니 가이드나 포터라도 갈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다. 그런 친구들과 네팔 서쪽을 다니다 보면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도 난생처음 가는 곳에서는 여행자가 되었다.
시원하게 뚫린 잘자라 패스 정상에서는 감탄부터 나왔다. 여기 진짜 미쳤다! 고작 3,000m대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니. 숨겨진 보물을 찾아낸 것 같았다. '하얀 산'을 뜻하는 다울라기리는 안나푸르나에서 볼 때는 날개를 활짝 펼친 모습이다.
다울라기리Dhaulagiri(8,167m) 옆으로 닐기리Nilgiri(7,061m), 안나푸르나Annapurna(8,091m), 마차푸차레Machhapuchhre(6,997m)도 보였다. 왜 이런 곳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안나푸르나만 하더라도 구석구석 붐비는데, 바로 옆인 다울라기리 주변은 그렇지 않았다. 숙식은 좀 불편하겠지만 한적한 트레킹을 하기에는 그만이었다.
4만 보 넘게 걸었으나 숙소는 아직
정상에는 여름내 목동들이 머물던 오두막이 있었다. 주변이 온통 초지라 야영하기에 좋고, 근처에 샘물도 있었다. 여유가 있다면 하루쯤 야영해도 좋을 듯했다(백패킹도 가능하다). 하산은 왔던 길을 돌아가거나 도르파탄까지 더 깊은 오지로 갈 수도 있다. 나는 이곳에서 도르파탄으로 향했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 도르파탄 입구에서 라전과 다와를 기다렸다. 그런데 기다리던 곳이 학교 앞이었다. 마침 하교 시간이라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고, 나는 졸지에 동물원 원숭이가 되었다. 저학년부터 고학년까지 아이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나를 볼 때마다 "나마스테!" 하며 인사를 했다. 그때마다 나도 같이 인사를 했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맹이들은 내 앞을 떠나지 않고 자기들끼리 킥킥거렸다.
"버히니(손아래 여자를 부르는 호칭), 도르파탄 호텔 처(도르파탄에 호텔이 있니)?"
녀석들은 호텔이 뭔지 모르는지 자기들끼리 웃기만 했다.
"타 처이나(모르니)?"
"허즐(네)!"
서너 명이 동시에 대답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하지만 나의 네팔어가 짧아 아이들과의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라전과 다와가 도착한 건 20분 뒤였다. 다와는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마을에 호텔이 있는지 물었다. 그중 한 아이가 여기서 1시간쯤 가면 호텔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은 마을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다리가 석고처럼 굳어갔다. 이날 우리는 모레니부터 약 28km, 4만 2,000 보를 걸었다.
다음날 아침 서리가 잔뜩 내렸다. 어느덧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우리는 북쪽을 향해 남은 걸음을 이어갔다. 그리고 5일 동안 3개의 고개를 더 넘어 하돌포에 도착했다.
잘자라 패스 트레킹 정보
* 기본 일정 : 카트만두-포카라-다르방-다라파니(1,560m)-무나-모레니(2,275m)-잘자라 패스(3,414m) : 원점회귀
* 트레킹은 4~5일이면 되지만 이동시간을 포함해 9~10일 정도 필요하다.
* 난이도는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와 마르디 히말과 비슷한 수준이고, 숙소는 열악한 편이다.
* 여행 적기는 랄리구라스(네팔 국화)가 산을 덮는 4월, 하늘이 청명한 10~11월이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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