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간 끈끈한 애정 따윈 기대 말라
*김세인 감독의 첫 장편영화인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2021년 부산영화제 뉴커런츠상을 포함해 5개 부문에서 수상하고 서울독립영화제와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됐으며, 2022년 무주산골영화제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도 수상 행보를 이어갔다. 11월10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다수의 영화제를 사로잡은 이 영화의 기이한 힘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라니. 두 여자의 관계를 수식하는 이 제목에서 속옷마저 공유하는 끈끈한 애정의 서사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을까.
행여 존재한다고 해도 그 기대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일찌감치 산산조각이 난다. 이정(임지호)은 집 화장실 세면대에서 속옷 뭉치를 빠는 중이다. 그보다 나이 든 수경(양말복)이 누군가와 시끄럽게 전화 통화를 하며 거침없이 세면대 옆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더니, 팬티를 벗어 이정에게 신경질적으로 건넨다. 이 광경을 불만에 찬 눈으로, 그러나 대꾸 없이 바라보던 이정은 새로 빤 속옷의 물기를 꼭 짠 뒤 수경에게 준다. 수경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요란한 무늬가 그려진 젖은 속옷을 입고 떠들썩하게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자 화장실에는 이정과 물기를 머금은 속옷 빨래가 침묵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다.
더없이 내밀하고 사적인 물건, 행동 혹은 공기가 어떤 수치심도 없이 관성적으로 교환되는 영화의 시작점에는 관계의 권력 또한 확연히 새겨진다. 장면의 모든 요소는 폭발 직전의 날카로움으로 팽배해 있다. 외모, 기질, 기세, 말투 등 모든 면에서 명백히 대비되는 수경과 이정, 이들은 엄마와 딸이다. 강렬하지만 왠지 외면하고 싶은 도입부는 세면대에 한데 뒤엉킨 속옷들처럼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엉겨 붙은 모녀의 진저리 나는 관계를 예견한다. 아니, 선언한다.
속옷 벗어주는 엄마, 속옷 빨아주는 딸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초반의 팽팽한 긴장을 얼마지 않아 수경과 이정이 마트에 동행하는 장면에서 충격적인 양상으로 터뜨리고 만다. 어쩐 일인지 둘은 잔뜩 화나 있다. 영화는 그 이유를 세세히 알려주는 대신 혼자 무거운 짐을 들고 뒤늦게 차에 타 씩씩대는 이정과 그런 딸을 답답해하며 감정을 폭발하는 수경을 가까이서 주시한다. 이정을 무차별적으로 때리며 고함을 지르는 수경의 폭력성은 어딘지 맹목적이고, 침묵하며 견디는 이정의 상태는 어딘지 피학적이다. 더는 참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온 이정이 차 앞에 서서 수경을 노려보는 그때, 수경의 차가 이정을 덮쳐 쓰러뜨리고 만다.
이 상황은 수경의 주장처럼 급발진 사고일까, 이정의 항변처럼 고의적인 사건일까. 어느 쪽이라도 엄마의 차가 무방비한 딸을 들이받은 사태의 끔찍함은 덜어지지 않으나 영화는 이 순간을 모녀 관계에 갑작스레 닥친 비극이 아니라, 다소 극단적으로 폭발한 그들 일상의 해묵은 국면처럼 다룬다. 사건이건 사고이건 이 대목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 지워지지 않는 가장 섬뜩한 얼룩으로 남지만, 두 여자의 관계에 별다른 변곡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일련의 영화들에서라면 이런 설정에 극적 전환점으로서 특정 맥락이 자리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여기에 서사적 기능을 심어두는 대신 두 여자의 감정적 파열을 형상화하는 데 집중한다.
애증, 질투, 연민, 집착, 희생, 후회, 미련 등에 휩싸인 모녀 서사의 굴곡은 그리 낯설지 않지만 이 영화처럼 엄마와 딸 각자의 감정을 어떤 우회로나 여지도 배제한 채 일말의 화해나 해소의 가능성 없이 끝까지 밀어붙인 사례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 영화는 딸을 향해 “죽어버리라”는 말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여자로서 자신의 삶이 낭만적이길 욕망하는 엄마, 엄마로 인한 고통에 오래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아이처럼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딸의 요동치는 내면을 그 밑바닥까지 독하게 응시하며 단 한 순간도 타협적인 감상에 빠져들길 거부한다. 부자 관계의 갈등과 적대를 다룬 수많은 서사가 끝내 떨쳐버리지 못하는 신파적 호소와 감상적 가족주의는 이 영화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엄마를 평생 갉아먹는 존재
요컨대 수경은 딸에게 희생한 자신의 과거를 거듭 상기하며 고작 39㎏에 불과하던 자기 몸에서 4㎏이 훌쩍 넘는 무게로 태어난 딸을 평생 자신을 갉아먹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애인 종렬(양흥주)과의 관능적인 관계를 통해 잃어버린 지난날을 보상받으려 한다. 이정은 엄마의 오랜 폭력성이 자신을 망가뜨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엄마 곁을 유령처럼 맴돈다. 그 역시 회사 동료 소희(정보람)에게 정서적으로 과하게 의존하며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 한다.
이들은 줄곧 자신의 방어성과 공격성이 상대의 죄, 아니 존재 자체에서 비롯됐다고 정당화하며 가족 울타리 바깥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정작 가족과 제대로 분리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서로를 겨냥한 이들의 지독한 원망에는 그보다 질긴 자기혐오의 감정이 은폐돼 있다. 살아남기 위해 오랜 세월 생의 고단함과 비루함을 빨아들인 엄마는 자기 안에서 미처 감당하지 못한 그 구정물을 딸에게 쏟아내고, 엄마의 감정적 오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딸은 그걸 엄마 이외의 다른 무엇에 분출할 방도를 발견하지 못한다. 영화는 두 여자를 가둔 폐쇄된 악순환의 굴레에 미약한 출구의 빛을 마련하면서도 이내 그 가능성을 좌절시키며 결국 이들이 홀로 혹은 둘이서 버텨내야만 하는 시간을 고집스레 비춘다.
수경은 이정에게 “넌 왜 자라지 않아”라고 다그치지만, 사실 감정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상태라는 점에서는 둘 다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화는 이들의 상태를 재단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를테면 거칠고 이기적인 엄마 수경에 대해 감독 김세인은 “수경은 엄마라는 역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는 장력이 있는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수경은 그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본인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단단한 생활력을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중략) 엄마라는 ‘사람’이 아닌 그가 그럴 수밖에 없던 ‘시스템’을 바라보는 부감의 시선을 관객들도 획득하기를 바랐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배우들과 나눈 대화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기도 했다. “가치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 바라보기에 대해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인물이 위치해야 하는 기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롯이 감정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이야기 속 인물은 본인의 행동 논리 안에서 움직입니다. 외부의 시선으로 기능을 규정한다면 인물이 그 기능에만 멈춰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끊어내려면 일단은 보여줘야 했습니다’, <필로> 25호) 이 영화를 추동하는 중층성과 고유한 밀도는 감독 말대로 서사 안에서 인물의 기능을 설계하는 일보다 때로는 모순적이고 때로는 절대적인 그들의 감정을 재현하는 일에 몰두한 결과일 것이다.
우아하게 독립할 수 있다는 착각
엄마와 딸이기 전에 온전한 ‘나’로 살 수 있을까. 격렬히 반목하지 않고도 우아하게 서로에게서 독립할 수 있을까. 영화는 결말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전자의 물음에 이르기 위해 치열하게 부딪쳐보지만, 후자의 바람에 손쉬운 환상으로 답하지 않는 태도를 고수한다. 마치 정글에서 맨몸으로 으르렁대는 짐승들처럼, 사회와 문명이 강제한 역할과 관계에 주눅 들지 않은 채 본능적이고 뜨겁고 야생적인 감정으로 끝까지 싸우는 두 여자의 자세에서 김세인은 관계의 민낯을 먼저 대면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희망, 해결, 치유는 요원하고 한없이 피로하고 절망적이며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민낯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다면, 엄마와 딸의 부서진 관계는, 그리고 ‘나’는 과연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겠냐고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우리에게 묻는다. 그 민낯은 힘겹지만 정직하다.
남다은 영화평론가·<필로>(FILO) 편집장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