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경의 멀티버스는 왜 놀라운 성취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한국어 제목이다. 영어 사용자는 이 제목을 일상어의 문장으로 기억하기 그리 어렵지 않지만 한국인들은 이걸 에브리씽 어쩌고라고 읊는 대신 그냥 포기하고 ‘양자경의 멀티버스’라고 부르게 된다)가 개봉된다는 소식이 뜨자 인터넷에 이런 질문이 올라온다. “양자경 나온다는 영화에 멀티버스가 나온다는데 혹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관계있나요?” 순진한 질문이지만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은 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큰 역할을 맡았던 루소 형제가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답을 말하자면 당연히 상관없다. 마블 영화에 나오는 큰 아이디어 대부분이 그렇듯, 멀티버스도 기성품 아이디어다. SF에 쓰인 지 수십 년이 되었고 비슷한 아이디어는 수천 년도 더 되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지몽’ 에피소드도 일종의 멀티버스 이야기이다. 현대의 SF 작가라면 조신이 꿈속에서 겪은 또 다른 삶이 멀티버스의 다른 조신이 겪은 실제 경험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 수 있다.
멀티버스 가설은 현대 물리학의 진지한 일부이고 이야기꾼의 재미를 위해 만들어낸 뭔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SF 작가들은 이 소재를 자유분방하게 써먹었다. 그 대부분은 과학과 큰 상관이 없다.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해 과학적으로 들리는 설정들이 나열될 뿐이다. ‘스타트렉’ 시리즈도 ‘거울 우주’라고 불리는 멀티버스 이야기를 잘 써먹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중에는 양자경이 우리 우주의 정의로운 우주선 함장과 거울 우주의 사악한 테란 제국 황제로 나오는 ‘디스커버리’ 시리즈도 있다. 그러니까 심지어 양자경에게도 멀티버스는 처음이 아니다.
멀티버스의 활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대부분은 현실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가능성의 영역을 다룬다. 과거로 가는 많은 시간여행물, 이를 통한 대체 역사 이야기도 이에 속한다. 만약 히틀러가 승리를 거두었다면. 대한제국이 지금까지 유지되었다면. 지구를 치려던 운석이 살짝 빗나가 공룡이 멸종하지 않았다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이런 가능성의 세계를 다룬다. 양자경이 연기하는 에블린은 아버지가 반대한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남편 웨일랜드와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살아가는데, 남편이나 얼마 전에 커밍아웃한 딸 조이와의 관계도 삐걱거리고 경제적으로도 위태롭다. 이런 와중에 국세청의 세무조사까지 받으려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SF 틀 안에서 만들어낸 가족 드라마
이런 에블린에게 전 우주를 구하라는 임무가 떨어진다. 다른 유니버스의 에블린이 멀티버스를 연결하는 기술을 발명했고 이로 인해 대재앙이 발생하는 중인데, 에블린은 지금까지 최악의 선택만을 해왔기 때문에(이 설정은 아시아계 여성에게 주어진 삶의 제한을 상징한다) 오히려 다른 멀티버스의 에블린이 가진 재능과 능력을 가장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게 말이 되는지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에서 과학적 그럴싸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양성과 다채로움이다.
이 다채로움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대부분 영화적인 재료다. 일단 영화가 셀링 포인트로 잡고 있는 건 한 영화에서 온갖 모습의 양자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자경은 세무조사에 시달리는 평범한 이민자로 나오기도 하지만 쿵후 고수이자 영화 스타이기도 하고, 핫도그 손가락을 가진 레즈비언이기도 하고, 눈이 먼 가수이기도 하고, 미치광이 과학자이기도 하고, 철판 요리사이기도 하고, 피자 광고판을 놀리는 직원이기도 하고, 돌이기도 하고, 피냐타(멕시코 인형)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는 각각의 유니버스를 영화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가족물, 무협물, 액션, SF. 수많은 패러디 역시 동원된다. 〈캐롤〉 〈매트릭스〉 〈라따뚜이〉 〈화양연화〉와 같은 영화들. 그러니까 이 영화를 이루는 건 시네필(영화 애호가)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현란한 파편이다.
이런 영화는 한없이 얄팍해질 수 있다. 만화경의 구경거리를 줄 수 있어도 영화적 지식의 풍부함을 오타쿠적으로 과시하는 것에서 멈출 위험이 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광의 재료로 짜인 관습적인 SF라는 틀 안에서 성공적인 가족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처럼 아시아 이민자 가족의 세대 갈등을 다룬 영화들은 최근에 꽤 자주 나오는 편이었다. 가까운 예로는 엄격한 엄마 밑에서 자란 캐나다에 사는 중국계 여자아이가 레드 팬더로 변하는 〈메이의 새빨간 비밀〉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장르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이민 2세대와 3세대 아이들이 창작자인 어른이 되었고 세상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감독 팀 중 한 명인 대니얼 콴도 아시아계 이민자 가족 출신이니 영화는 당연히 당사자성을 지닌다.
영화는 훨씬 위험한 경계선, 그러니까 정신 건강의 영역에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영화의 주인공 에블린은 ‘주의력결핍 과다(과잉)행동 장애’를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대니얼 콴은 여기에도 당사자성이 있다), 딸 조이가 종말의 날 무기처럼 자랑하는 모든 것들이 다 흡수된 절대적인 베이글은 자살 충동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평범한 이야기꾼에게는 대리만족의 재료로 멈추고 마는 멀티버스의 설정도 극단적 허무주의를 대변한다. 이미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그냥 존재하는 우주에서 우리의 행동과 생각과 감정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지막 질문엔 완벽한 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가능성에 바탕을 둔 추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 질문이 현실세계, 실제 사람들이 사는 다채롭고 입체적인 세계로 돌아오면 우리는 논리적으로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일단 그 질문 자체가 특정 정신상태로 고통받는 사람의 내면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을 언어로 풀면 가족 간의 사랑과 용서, 이웃에 대한 친절한 태도와 이해 같은 평범한 답이 나온다. 훌륭한 영화는 대부분 이런 평범한 설명을 초월하기 마련이다.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도(그들 대부분은 알아들어도 평범하기 짝이 없다) 감동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가 그런 것처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 현란한 스펙터클의 재료들을 감정적으로 통제해 감동적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그 재료는 정상적인 감동적 드라마의 재료와 맞지 않는 것이기에 그 성취는 더욱 놀랍다. 인형 눈을 붙인 돌과 요리사 머리 위에 앉은 너구리가 그렇게 절절하게 보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듀나 (SF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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