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천고마비 계절에 연암 박지원을 만나다

김병모 전 고려대학교 겸임교수 2022. 11. 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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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모 전 고려대학교 겸임교수

천고마비 계절을 맞아 연암 박지원을 만나려 한다.

"하늘과 땅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끊임없이 새 것을 낳고 해와 달은 오래되었지만, 그 빛은 날로 새롭다. 만물은 끊임없이 새롭게 변함으로 우리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연암의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만나려 한다.

연암은 1737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박사유와 함평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는 5대조 할아버지가 선조 부마(駙馬)로 노론 벽파 명문가 출신답게 문장력이 뛰어나 과거시험을 통해 입신양명(立身揚名)했으면 하는 가문으로부터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과 다르게 연암은 체질적으로 과거시험에는 관심이 없다.

1768년 연암은 종로 원각사 백탑 주변 초가삼간으로 들어온다. 시서화에 능통한 연암이 종로로 이사 왔다는 소식에 주변 젊은 석학들이 흥분한다. 서양 문물에 밝은 홍대용을 중심으로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박제가 등이다. 연암은 그들을 스승 삼아 때론 벗 삼아 세상을 관조한다. 그들은 백탑 주변에 모여 시와 문학을 교류하면서 많은 시사회를 열어 시문학적 담론을 펼친다.

이서구를 제외한 모두 서자(庶子)출신 벗들로 인(仁)사상을 넘어 이용후생 실사구시를 중시하여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비록 오랑캐(청나라)라 할지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 연암의 입장이다. 그래서 그는 연경(북경)을 가야 했고, 무박 4일 열하(熱河)를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연경을 가기까지는 이미 다녀온 종로 백탑파 친구 홍대용과 박제가 등의 강력한 권유도 한몫 했으리라.

열하(熱河)에서 돌아온 연암은 집필 작업에 돌입한다. '열하일기'는 압록강을 도강하여 청 검문소 책문을 넘어 심양(성양)을 지나 만리장성 산해관을 통과 북경에 도착하여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건륭제(乾隆帝)가 있는 피서행궁 열하로 향한다. 일행이 열하에 도착 6일간 머문 후 북경으로 되돌아온 과정까지 저잣거리에서 들은 청의 정치 경제, 생활 문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열하일기는 퇴고하기 전에도 장안(한양)의 화제가 된다. 마침내 정조대왕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중국 역사, 사서삼경 고문(古文)에 익숙한 정조는 어떤 형식도 갖추지 않은 생활문체 형식의 소품문(小品文)으로 씌어 진 '열하일기'가 매우 못마땅했다. 정조는 연암 소품문이 문체를 흐린다는 명목으로 연암을 불러 반성문, 자송문(自訟文)을 쓰게 하여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주도한다.

문체반정으로 정조는 본의 아니게 18세기 조선 문예부흥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되고 만다.개혁 군주 정조의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이 시점에서 우리가 18세기 연암 박지원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해 밝히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작품 속에는 우정의 철학이 있다. 연암은 젊었을 때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는 우울증을 고쳐보려고 당시 잘 나가는 노론 벽파 사대부 가문에도 불구하고 몰락한 양반이나 분뇨 장수, 거리의 부랑아, 말 거간꾼 같은 불가촉천민들을 가리지 않고 두루 만나 그들의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연암은 그들 삶의 처절한 현장 경험을 심층적으로 관찰한 후, 그 결과에서 나온 유머와 해학들을 찾아 글로 옮긴다. 연암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형식을 갖추지 않은 일상생활 체의 글로 글쓰기를 시도한 것이다.

연암의 우정의 철학은 열하로 가는 도중에서도 나타나는데, 만리장성 산해관을 통과 '관내정사'를 쓰는 과정에서 길거리 사람들, 식당 주인과 스스럼없는 대화를 통해 그려진다. 이 과정에서 양반의 위선적인 삶과 인간사회의 비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호질(虎叱)'이란 작품이 등장한다.

둘째, 유머와 해학 그리고 역설이 있다. 연암은 익살스럽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해학적 글쓰기로 양반사회를 통찰하고 이를 비판하여 새로운 현실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양반전'을 통해 독특한 풍자(諷刺)와 해학으로 기득권층 양반계급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등 일반 평민의 구어체로 글쓰기를 시도하여 문체 혁신을 시도한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끝이 보이지 않은 요동 땅을 지날 때도 "호곡장(號哭場)이로세"라고 말하면서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장소라는 역설적(paradox) 표현을 쓰기도 한다.

셋째, 유목문화 노마드(nomad) 정신이 있다.

연암은 특별히 할 일을 찾지 못한 차에 1780년 5월 자신의 8촌 형 박명원의 권유로 청나라 황제 건륭제 칠순 생일잔치 사행단에 참여하게 된다. 사행단은 보통 황제가 있는 북경까지 가는데, 건륭제가 열하 피서 행궁에 머무는 바람에 열하까지 가게 된다. 북경에 머물게 되는 일부 사절단 일행도 있었지만, 연암은 유목 노마드 정신이 발동되어 특별한 임무 없이 만리장성 고북구 장성을 넘어 열하로 향한 무박 4일간 대장정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일야구도하기', '야출고북구기'등 명문장들이 쏟아진다.

숨 가쁜 일상에서도 낙엽이 지기 전 열하일기나 호질, 그리고 양반전과 같은 해학적 고전소설 한 권이라도 읽고 그의 우정의 철학,유머와 해학 그리고 역설, 노마드 정신을 세기면서 깊어가는 가을 하늘 별빛을 헤아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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