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준의 마음PT] 자꾸 떠오르는 이태원 그날 밤…어떻게 극복하나
# 이태원참사를 지켜보면서 우리들의 뇌 속에는 또 하나의 트라우마(trauma)가 생겨 작동하기 시작했다.
8년전 세월호 침몰사고 때 익히 경험한 바처럼 사고 당시 비참한 상황과 감정이 끊임없이 재현되면서 심리적 불안과 우울, 분노를 느끼는 증상, 즉 정신적 외상(外傷)에 따른 충격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일상의 기억은 아주 쉽게 잊힌다. 우리 뇌의 정보처리시스템이 불필요한 정보는 덜어내고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정보만을 저장하려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라우마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끔찍한 사고나 사건 등 ‘빅 트라우마(big trauma)’는 결코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 느낀 충격적인 시각적·신체적 감각과 감정이 더 생생하게 살아남는 특징이 있다.
설령 긴 세월이 흐르고, 행복스런 시간 속에 살고 있더라도 트라우마는 사소한 빌미만 제공되면 언제든지 튀어나와 당시의 고통스런 상황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이유 없이 두려움에 떨고, 불안에 사로잡히고, 갑작스럽게 분노가 폭발해 나온다. 자기 주장을 조리 있게 하거나 입증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설득하지 못한다. 중년·장년·노년의 나이가 돼도 옛날 옛적 코흘리개 시절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가득찬 기억의 파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빅 트라우마 뿐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었던 무수한 ‘스몰 트라우마(small trauma)’도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휴화산일 수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경험, 부모님의 잦은 부부 싸움, 아빠·엄마로부터 받은 질책이나 폭력, 학교에서의 왕따, 친구와의 싸움에서 진 일, 발표시간 때 실수, 선생님으로부터 심한 질책,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한 경험, 동네 깡패들에게 얻어맞았을 때 등 자신감이나 자존감을 잃게 만드는 자잘한 사건 둥등….
상대적으로 정신적 충격이 적은 이 트라우마들은 인간 뇌의 메카니즘에 의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에서 사라져, 의식 너머 저편 무의식의 저장창고로 넘겨지게 되나 언제 어디서든 여러 행태로 되살아날 수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을 보고 섬뜩한 무서운 인상을 받았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아주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힌 동네 어른의 인상과 비슷하다던가, 특정음식만 보면 속이 불편해지는데 실은 과거 그 음식을 먹고 체한 경험이 있었다던가 말이다.
만약 ‘스몰 트라우마’를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번 반복해 경험하게 된다면 이것은 ‘빅 트라우마’ 못지 않거나, 그보다 더한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어린 시절 가족·친지 등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받은 조롱·학대·성폭력 등은 일반 트라우마보다 더 심한 ‘외상(外傷)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로 발전돼 극도의 자기부정이나 파괴적 인간관계로 이끈다.
미국에서 가끔 일어나는 학교 동료를 상대로 한 청소년들의 총기난사사건등을 추적해보면 이런 주변 인간관계에서 받은 트라우마들이 가해자의 인생경력에서 발견된다.
# 살아오면서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피할 수 없다.
나도 ‘빅 트라우마’가 있다. 태어난 지 14개월만에 아빠가 비극적인 사고로 돌아가시고, 실의에 빠진 엄마는 얼마 뒤 집을 나갔다. 워낙 어린 시절 겪은 터라 당시에는 아무런 기억도 없고 큰 어려움도 없었다. 나를 돌봐준 조부모께서 워낙 헌신적으로 키워주셨고, 다른 집으로 개가한 어머니께서도 이후 자주 찾아오셔서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를 주셨기 때문이다.
이른바 트라우마 후유증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안정적인 애착관계(secure attachment)’를 경험하며 살아온 것이다. 만약 그런 관계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내 인생 행로도 꽤나 파란만장했을 성 싶다.
그러나 아무리 안정적인 관계 속에서 자랐더라도 아빠·엄마의 품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왜 이유 없이 분노와 반항, 그리고 불안과 자책감이 쌓이는 지를 그때는 몰랐다.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도 왜 늘 ‘혼자’라는 생각, ‘뭔가 잘못살고 있다’는 자책감,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그때는 몰랐다.
결국 50대 후반 우울증을 한번 호되게 겪은 뒤 성찰과 치유과정을 통해 내 마음의 혼란스러운 근본 원인을 알게 되었고, 이후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넓히면서 ‘빅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니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들이 없었다. 나는 부모가 없이 자란 게 트라우마였지만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부모의 기대가 너무 커 이에 부응하지 못하고 좌절한 사람들, 부모의 일방적인 강압에 의해 무시되고 학대받고 자란 사람들, 부모의 지나친 과보호로 인해 결국 평생 의존적으로 살게 된 사람들…. 이들의 겪은 트라우마는 자기 세대에 그치지 않고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악명높은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1905~1997)은 삶에서 트라우마는 피할 수 없지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반응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좌우된다.”
# 현대 트라우마 치료의 기본토대는 그 고통스런 기억을 덮어두거나 회피하지 말고, 의식으로 끄집어내 마주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 부정적 에너지를 스스로 견뎌내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너무 서둘러 꺼내면 오히려 기억에 압도돼 상태가 더 안 좋을 수 있다. 아주 신중하게, 천천히,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감정의 후폭풍을 견딜 수 있도록 마음 속에 튼튼한 갑옷이나 커다란 무기 등 강력한 보호장치를 갖추고 있어야하며, 평소 명상 등을 통해 마음의 체력을 쌓아 놓아야 한다.
또한 늘 옆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최소한 1인 이상 존재해야 한다. 가족이든, 친구든, 치료자든 그가 “내가 지금 함께 있어요(stay with me)”라고 말해줄 때 힘을 얻는다.
만약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미국의 링컨 대통령처럼 신앙의 힘에 맡기거나, 영국의 처칠 총리처럼 그림 그리기 등 예술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들 역시 가족관계에서 온 트라우마의 희생자들이었다.
이런 준비된 상황 속에서 힘들지만 많은 반복과정을 통해 트라우마 기억을 통합적으로 되살릴 수 있다면 예전 같은 강렬한 감정이 올라오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이때 트라우마 사건은 비극적이고 고통스런 특별한 사건이란 기억에서 벗어나, 삶 전체에서 그리 중요하지도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이야기로 서서히 변해간다고 한다.
물론 트라우마 기억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강도는 점점 줄어들고, 트라우마 기억은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로 전환되며,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점차 잃었던 자존감과 자기효능감이 살아나게 된다.
마치 어린 시절 그토록 무섭게 느껴지던 벼랑길도 조심조심 계속 다니다 보면 언젠가 휘파람 불면서 뛰어다닐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듯이 말이다.
우리 모두 이태원 참사의 트라우마를 현명하게 대처해 이겨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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