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시선] 오래된 라디오, 문학에 묻어나다
귀로 들으며 자유롭게 행동 가능
청취자와 희로애락을 함께한
의미로만 남아도 그 나름대로
문학적 가치 충분할 것
‘언제부턴가 내 몸 속에서/ 지지지- 잡음이 새어 나온다/(중략) 졸업선물로 사주신 라디오/ 아버지가 그리우면 주파수를 돌려본다/ 병약한 딸의 가녀린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떨리는 목소리/(중략) 라디오를 들고 동네 전파사를 찾는다/ 천상의 아버지에게 다리 놓으러 간다’
2015년 등단한 조성례 시인의 시집 ‘가을을 수선하다’에 수록된 시 ‘금성 라디오’의 일부다. 시인은 ‘라디오’라는 차가운 금속 매체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으며 어느 집이나 그러했듯이 평범한 아버지의 잔정을 하늘 한번 보면서 그리워하고 있다. 라디오는 1960년대 정부의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에 힘입어 70년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대부분 농촌에도 보급되었다. 중견 시인 박해림의 시집 ‘고요, 혹은 떨림’에서도 다음과 같이 라디오가 추억의 중심 모티브로 등장한다.
‘한 때는 신품이었을 저 몸/ 언덕을 오르는 리어카에 실려 있다/(중략)새벽이면 언제 나/ 가장 먼저 눈을 뜨시던 아버지/ 그 손에 악기처럼 들려서 켜지던/ 국산 금성 라디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중략)/ 어린 우리들의 잠을 깨웠었다’
아버지의 기억과 함께 시인이 인용했던 ‘새마을 노래’ 가사는 농어촌 부흥 운동과 더불어 1972년 당시 10월 유신의 정당성과 결합되어 전 국민에게 개척정신을 북돋웠던 과거를 소환하기도 했다. 이처럼 목가적 시선을 가진 시인은 그 시절의 라디오에 대해 가정마다 소중한 가족애가 서려 있는 감성적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반면 사회적 병리 현상의 도구나 부속물로 인식하고 접근한 시인도 물론 있었다. 냉혹한 현실의 가장 첨예한 모순과 직면한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에 게재된 ‘석양’이라는 시에서는 라디오를 그리운 추억과 감성적 대상이 아닌 제3의 목적물로 표현하기도 했다.
‘수작 부리지 말고 쓰러지지 않을 지경이면 잔업 하라고 해/ 주임님의 고함 소리에 노을이 검붉게 탄다/(중략) 라디오 스피커에선/보람된 일과를 마치고 그윽한 한 잔의 커피와 연인과의 대화 속에(중략)/ 노을도 아름다운 싱그러운 저녁입니다. 오늘도 연예가 산책에 이어/ 프로야구 소식과...먼저 정수라가 부릅니다/ 아아 우리 대한민국/(중략)석양은 마지막 검붉은 빛을 토하며/ 순이의 슬픔도/ 명지의 눈물도/ 어둠 속으로 거두어 간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암담한 현실의 미싱사에게 라디오란 노동의 집중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값싼 오락물임을 시인은 시사하고 있다. 또한 1960년대 저항 시인으로 알려진 김수영은 그의 전집(Ⅰ)에 실린 시 ‘금성 라디오’를 통해 막 산업사회에 진입하면서 나타나는 그 당시 대중 소비시대의 실상을 불만과 체념이 뒤섞인 어조로 탄식했다.
‘금성 라디오 A-504를 맑게 개인 가을날/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500원인가를 깎아서/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그만큼 손쉽게/ 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중략)/어젯밤에는 새 책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왔다/ 아내는 이런 어려운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해치운다/ 결단은 이제 여자의 것이다/ 나를 죽이는 여자의 유희다/ 아이놈은 라디오를 보더니/ 왜 수련장은 안 사왔느냐고 대들지만’
실제로 경제권을 쥐고 있는 가정주부가 가장의 생각은 아랑곳없이 소비의 주체가 되어 아들의 수련장은 뒤로 미루고 첨단의 신식 매체를 장만한다는 행위에 대해 시인은 허탈함과 무저항에 자괴감을 느끼지만 은근슬쩍 호기심이 발동하여 라디오의 모델명까지 시어(詩語)로 선택한 점은 어쨌든 매우 이례적이다.
사실, 근대 최신식 매체인 라디오가 포털, 유튜브, 1인 방송 등에 밀려 영향력이 축소된 것은 맞지만 라디오 고유의 절대적 장점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것은 바로 귀로 들으며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청취의 수평성이 아닐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라디오가 시인들의 다양한 시각으로 시대 상황을 반영한 문학에 등장했던 사실은 그 시대의 청취자와 희로애락의 삶을 함께했다는 의미로만 남아도 그 나름대로 문학적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라디오의 혁신은 시대적 요구이며 사명이다. 그동안 라디오는 인터넷망을 통한 오디오 또는 비디오 파일 형태의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 사용자가 선택 구독할 수 있는 팟캐스트, 지역주민을 위한 공동체 방송 등 대중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하며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련한 과거의 기억을 애써 붙잡으며 가끔 그 시절의 다이얼을 돌리는 까닭은 디지털 시대에 지친 고단한 현대인에게 잠시나마 심리적인 익숙함과 편안함을 주는 만만한 대상이 바로 오래된 라디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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