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질환 60만명, 병원 수십곳 다니며 ‘진단’

안영 기자 2022. 11. 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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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 후 첫 방문부터 진단받기까지 평균 21개월 걸려

대구에 사는 민수진(47)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갑자기 눈두덩과 입술이 벌에 쏘인 것처럼 두껍게 부어올라 고통을 겪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진단명이 달라졌다. 콩팥에 문제가 있다는 말도 들었고, 알레르기 검사도 받았다. 그러다 마흔 가까워서야 서울 대형병원에서 ‘유전성 혈관 부종’이란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발병 30여 년 만이다. 민씨는 “이젠 급성 발작을 가라앉히는 주사제로 응급처치가 가능해졌지만, 좀 더 일찍 병명을 알았더라면 수십년간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씨처럼 희귀 질환을 앓는 환자는 국내에만 60만명가량(2020년 기준). 질환 종류만도 900여 개에 달한다. 희귀 질환은 환자 수가 2만명 이하이거나 진단이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환자 규모도 모르는 질환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자신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 병원을 돌아다니는 ‘진단 방랑(diagnostic odyssey)’에 지쳐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단 방랑’이 길어지면 “돌이킬 수 없이 증상이 악화돼 장기가 손상되거나 골든타임을 넘겨 치료 효과가 떨어질 뿐더러 합병증도 생기게 된다(이정호 순천향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점이 문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지난해 희귀 질환 환자와 보호자 456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증상이 나타난 후 병원 첫 방문부터 병명을 진단받기까지 평균 21개월이 걸렸다. 37개월 이상 걸렸다는 답도 13%에 달했다. 최종 진단을 받기까지 방문한 의료기관은 평균 2.8곳. 응답자 45%는 3곳 이상을 찾아야 했다. 이범희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교수는 “희귀 질환의 50% 이상은 소아기에, 나머지는 이후에 진단된다”며 “하지만 희귀 질환자의 30% 이상이 5세 이전 사망한다”고 말했다.

전문의들은 희귀 질환에 따라 다르지만 조기에 진단하고 제때 치료받으면 병세 악화를 늦추거나 정상인과 같은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내 의료 체계에서는 희귀병에 대한 정보도 부족할 뿐 아니라 지원 체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유전자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경우 정확한 진단에 이르기까지 수백만원 이상 들기도 한다.

이유 없이 근육 손실이 일어나 근력이 떨어지고 펭귄처럼 뒤뚱뒤뚱 걷게 되는 ‘폼페병’ 환자 자녀를 키우는 A씨는 다행인 경우다. 아이가 2018년에 미국에서 태어났을 때 현지에서 신생아 희귀 질환 선별검사를 통해 폼페병을 조기에 진단받고 바로 치료를 시작했다. 4살이 된 지금은 일상생활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호전됐다. 반면 지방에 거주하는 폼페병 환자 임지나(36)씨는 15살 때부터 동네 병원에 가도 “서울 큰 병원으로 가보라”면서 고개를 저을 뿐 정확한 병명을 몰랐다. 그러는 사이 병세가 악화됐고 13년 뒤폼페병 진단을 받긴 했으나 다리 근육이 종종 힘을 잃어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다. 호흡기 근육 손실까지 겹쳐 숨도 자주 가쁘다.

희귀 질환은 진단이나 치료가 가능한 병원이 적다. 이 때문에 의심 환자와 병원을 연결해주는 ‘허브’ 역할이 더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2019년부터 ‘권역별 희귀 질환 거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엔 2곳이었으나 지난해 서울 1곳, 지방 11곳을 포함 12곳으로 확충했다. 그러나 보사연에 따르면 지난해 설문에 응한 희귀 질환자 456명 중 거점센터 병원을 이용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78명(17.1%). 거점센터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도 226명(49.6%)에 달한다. 채종희 희귀질환중앙지원센터장은 “고칠 수 있는 환자를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진단·치료 자원을 충분히 보유한 ‘중앙 센터’와 환자 사후 케어에 집중할 수 있는 ‘권역별 센터’ 간 네트워크 강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대부분 시설과 인력이 중앙에만 몰려 불균형이 일어나고 있다.

영유아 조기 검사를 강화하자는 의견도 있다.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건강보험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2018년부터 건강보험으로 지원하는 50여 종 선천성 대사 이상 질환에서 폼페병·고셔병·뮤코다당증·파브리병 등은 제외됐다.하지만미국·일본 등 해외 선진국은 폼페병과 척수성 근위축증(SMA) 등 치료가 시급한 희귀 질환을 무료 선별검사 등에 포함시켜 일찍 진단해내고 있다. 미국에선 2015년 폼페병, 2016년 뮤코다당증을 선별검사 대상 질환군에 포함했다. 특히 폼페병은 22개 주, 뮤코다당증은 20개 주에서 지원을 받아 검사가 이뤄지고 있다. 또 47개 주에서 97% 신생아가 SMA 검사를 받고 있다. 이정호 교수는 “예전에는 치료제가 없어 치료를 못 했다면, 요즘은 치료제가 많이 개발돼 빨리 발견하면 그만큼 치료 효과도 크다”면서 “진단이 늦어져 합병증 치료비까지 들어가는 것보다 조기에 발견해 치료받을 수 있게 하는 게 이득”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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