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세상, 화가는 산 앞에서 ‘나’를 마주했다[영감 한 스푼]

김민 국제부 기자 2022. 11. 8. 03: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폴 세잔이 같은 산을 81점 그린 이유
1906년 10월 어느 날. 예순일곱 살 화가 폴 세잔은 늘 그랬듯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태풍이 몰아쳤고, 화가는 급히 짐을 챙겨 이동합니다. 그러나 화구와 캔버스, 이젤을 지고 가기에 비바람은 너무 거셌습니다. 집으로 향하던 화가는 결국 길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산을 마주하다 죽고 싶었던 화가

폴 세잔이 1902∼1906년 그린 작품 ‘생트빅투아르산’. 세잔은 1870년대부터 사망한 1906년까지 생트빅투아르산을 주제로 유화 36점과 수채화 45점을 그렸다. 사진 출처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김민 국제부 기자
몇 시간이 지나 쓰러진 채 발견된 그는 마차에 실려 집으로 옵니다. 의사는 감기에 걸렸을 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안심시킵니다. 다음 날 화가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다시 심하게 앓은 후 침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화가가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잔은 프랑스어로 ‘대상을 마주한 채(sur le motif)’ 죽고 싶다고 말했답니다. ‘Sur le motif’라는 프랑스어는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과거의 그림이 아닌 실제 풍경과 일상을 그리기 위해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세잔의 말은 내가 그릴 대상을 직접 눈으로 마주하고 관찰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의미였죠. 그의 바람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말년의 화가가 이렇게 야외를 고집하며 천착한 주제는 바로 어린 시절부터 자주 찾았던 ‘생트빅투아르산’입니다. 세잔과 절친했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어릴 적 산의 기억을 소설 ‘작품’에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야망과 높은 지성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두 사람을 묶어 주었다고 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무와 언덕, 시냇물을 동경했고 홀로 자유로워지는 것의 무한한 기쁨을 알았다”며 “속물적 세상으로부터 탈출구를 찾아, 본능적으로 자연의 품으로 향했다”고 했죠.

세잔은 이런 생트빅투아르산을 30대가 된 1870년대부터 말년까지 유화로 36점, 수채화로 45점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렁이는 마음의 산을 그리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의 해발 1011m 생트빅투아르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파리에서 고향집으로 돌아온 세잔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땅의 역사를 종합한 ‘마음의 산’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지질학자 친구를 통해 산이 형성된 토양에도 관심을 가졌죠.

그림을 보면 마치 조각천을 짜깁기한 ‘패치워크’처럼 색면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산의 지형은 물론 산 아래 마을의 집과 나무도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색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죠.

사진과 비교하면 그 특징은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진이 순간의 빛을 포착해 반사되는 작은 입자를 남겼다고 한다면, 세잔의 그림은 풍경을 좀 더 몽글몽글하게 표현합니다. 그 결과 사진은 찍힌 순간이 얼어붙은 느낌을 주는데 그림은 산과 나무와 집들이 서로 부딪치는 색깔로 일렁이는 느낌을 줍니다. 그 결과 산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묘하게도 사진이 아닌 그림이죠.

이는 풍경을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이해’한 바를 그림으로 풀어놓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단순히 사진기가 빛을 받아들이는 것과 달리, 내 마음과 생각이 반영됩니다. 이를테면 사과를 본다고 할 때 카메라는 빨간색과 형태만을 인식하지만, 사람은 맛과 향은 물론 그것의 상징까지 떠올린다는 것이죠.

세잔에게 산은 어린 시절의 나를 품어준 곳이자 오랜 시간 쌓여온 땅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입니다. 이것을 담기 위해 어떤 나무는 크게 그리고 또 어떤 길은 임의로 숨기거나 드러내며 조정 과정을 거칩니다. 그 결과 세잔이 렌즈가 아닌 ‘마음의 창(눈)’으로 보았던 산을 우리는 그림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세잔의 그림은 어떤 맥락에서 탄생한 것일까요?

신도 왕도 무너진 세계

세잔이 살았던 19세기 말 유럽은 격동기였습니다. 이 시기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사건을 세 가지로 꼽는다면, 첫째는 ‘고대 문명의 발견’, 둘째는 ‘종의 기원’ 출간, 셋째는 ‘1848년 혁명’입니다.

고대 문명의 발견, 특히 이집트 문명처럼 유럽 밖 대륙의 화려한 문화는 유럽인의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었습니다. 또 ‘종의 기원’은 인류가 영장류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제시해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죠. 이런 가운데 1848년 유럽 곳곳에서 제국에 반기를 드는 혁명이 일어납니다. 신과 왕의 세계에서 벗어나겠다는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세잔은 파리를 벗어나 고향의 산으로 향합니다. 믿었던 것이 무너질 때 사람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 혼란은 좌절 분노 허탈 등의 감정을 느끼게 하죠. 이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면 덫처럼 나를 옭아맵니다. 현명한 해결책은 나를 다시 직관하고 중심을 찾는 것입니다.

세잔은 혼란 속에서 산을 마주하며 선문답을 하듯,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생을 완성하기로 합니다. ‘대상을 마주한 채’ 죽기로 결심하면서 말이죠. 결국 평생을 바친 그의 예술은 ‘개인의 눈’을 표현해 자아의 탄생을 예고하며 불멸이 되었습니다.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하시면 이메일로 먼저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김민 국제부 기자 kimmin@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