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의도시산책] 이사철에 보는 전세살이 풍속도

2022. 11. 7.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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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차가구 평균 거주기간 3.6년
전세입자 금리 부담 월세 쫓겨
정부, 부자 감세·재건축만 몰입
임대시장 보호에도 유의해 주길

늦가을 쌀쌀한 바람이 불면서 주말이면 집 주변에서 이사 가고 오는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 동면의 긴 겨울철을 예고하는 것 같다. 아직도 우리의 주택 구조는 붙박이장이나 조립식 도구가 발달하지 못하여 마당에 풀어놓은 세간살이 속살 모습이 너절하고 추레하다. 무거운 이삿짐을 싣고 오르내리는 고가사다리를 올려다보면 아슬아슬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사를 자주 다니는 편이다. 작년 서울에서 217만명의 대이동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이사 풍경도 낯익은 도시생활의 패턴처럼 되었다. 임차가구의 평균 거주기간은 3.6년. 이사는 ‘내 집’이나 더 좋은 집으로 가기도 하지만, 전셋값이나 월세가 올라서 하향 이동하는 뜨내기도 많다.
이건영 전 국토연구원장·소설가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은 고단한 피난살이 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주인은 위채에서 호사하고, 세든 사람들은 아래채에서 여러 가구가 방 하나씩 차지하고 올망졸망 부대끼며 그래도 정겹게 모여 산다. 1970년대, 80년대까지도 서울의 주택보급률이 고작 50%대였으니 응당 한 집에 문간방, 사랑방, 건넌방, 이렇게 여러 가구가 나눠 쓰던 시절이 있었다.

임차행위도 엄연한 상행위로 까다로운 계약서를 쓰고 서명하지만, 세든 사람들은 늘상 ‘을’(乙)이다. 행여나 술 취한 남편이 밤늦게 들어와 잠든 주인을 깨울까봐, 또는 아이들이 주인집 아이 얼굴에 생채기라도 낼까봐 숨죽이며 살았다. 무엇보다 전셋값 올려 달라는 주인의 성화 탓에 조마조마하였다. 돈이 부족하면 방을 빼야 했다. 이사철 유랑민의 상당수가 이런 사람들이다.

‘전세’라는 제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순수한 한국산 제도다. 전세제도가 정착한 것은 1970년대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 집에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살 때는 ‘셋방살이’라고 했다. 주인이 집을 매입할 때 문간방 또는 사랑방 하나씩을 전세로 주어 부족한 대금의 일부를 융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은행대출은 꿈도 꾸지 못한 시절에 사(私)금융 역할을 해 주었다. 전세라는 말의 한자도 專貰가 아니라 傳貰다(왜 전할 傳 자를 쓰는지는 모르겠음). 지금은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서 셋방살이는 대부분 ‘셋집살이’가 되었다.

물론 ‘내 집’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주택보급이 가구 수만큼 되었다고 모두에게 집이 배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유효수요가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집값이 좀 비싼가? 그래서 구입 능력은 제한적이다. 서울에서 자기집에 사는 사람이 42%. 나머지는 셋집 신세이다. 한때 사글세를 내야 하는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전세가 대세다. 신혼부부는 조금 모은 돈을 전세 밑천으로 깔고 차곡차곡 사다리를 딛고 내 집 마련 고지로 올라가게 마련이다.

전세의 가장 착한 점은 임대료를 싸게 해준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임대료는 ‘집값’에 대한 기회비용과 관리비, 기업 이윤을 합해 정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전셋값은 집값의 반 정도 수준이다(2022 서울의 전세가율 54%). 재산세는 집주인 부담이다. 임차인은 정부의 전세금 대출 지원도 받는다. 대박이다.

그래서 경제 수준과 규모가 비슷한 다른 나라 도시들과 비교해 보면 서울의 집값은 아주 높지만, 임대료는 상대적으로 낮다. 가계지출 중 주거비 비중이 1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제일 낮다(영국 24%, 일본 22% 등). 매달 번 소득의 상당 부분을 주거비로 내야 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경제 활력과 소비 패턴이 다를 것이다.

주택시장은 오묘하다. 일반 경제 동향과의 관계도 그렇고, 집값과 전셋값의 쌍곡선 모양도 예측하기 힘들다. 때로는 동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로 움직인다. 어떻든 전세는 집값이 계속 올라주어야 지속가능한 제도다. 집값의 반만으로 집을 차지하는 것부터 정상적 시장논리로 설명이 안 된다. 경제성장기에는 집값이 계속 올라서 집값과 전셋값의 차이에 해당하는 투자금의 기회비용을 탕감해 주었다.

세입자는 효용가치로 전세에 살고, 집주인은 투자가치로 집을 보유하였던 것이다. 부동산 하락장에서는 일부 ‘깡통전세’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전셋값이 매매가의 하방저지선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부동산시장이 안정되면 당연히 전셋값은 집값과 같아야 하므로 전세제도는 없어져야 맞는다. 그러나 과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때 집값이 하락하였는데도, 집주인들은 집값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전세제도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갑작스러운 고금리시대를 맞아, 집값이 폭락하고 부동산 시장이 무너지고 있다. 못난 정부가 부추기는 바람에 ‘영끌’에 나섰던 젊은이들의 곡소리가 들린다. 167조원에 이르는 전세금 대출을 안고 있는 전세입자들의 이자 부담도 두 배 이상 뛰었다. 게다가 2년 전, 임차인의 고단함을 달래준다고 개정한 임대차법 탓에, ‘저는 임차인입니다’라고 외치던 윤희숙 전 의원이 경고한 대로, ‘착한’ 전세가 점점 값비싼 월세로 바뀌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셋집살이가 점점 고단해지고 있다.

정부의 주택정책은 부자감세와 재건축 부양에 몰입된 것 같은데, 임대시장 보호에도 유의해 주었으면 한다. 달팽이처럼 짐을 등에 지고 더 싼 집을 찾아 다니는 서민들의 발걸음이 언제 가벼워지려나.

이건영 전 국토연구원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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