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 사태 진화…대주주 나섰다
이자 줄이려다 채권시장 마비, 급히 자구책 내놔
금감원, RP발행 길 터줘 … 태광그룹 출자도 추진
흥국생명이 9일 만기가 되는 5억달러 규모 신종자본증권(달러 표시 영구채)을 예정대로 중도상환(콜옵션 이행)한다. 7일 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환매조건부채권(RP) 발행과 자체 유동자금으로 총 5600억원을 조달하는 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측은 대주주인 태광그룹이 강력한 해결 의지를 가지고 유동성 확보에 나선 결과라고 밝히면서도, 이번에는 그룹이 추가로 출자하거나 자금을 보태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흥국생명은 보유 중인 국채 등을 담보로 RP를 발행해 약 4000억원을 조달하고, 다른 보험사들도 1000억원 수준으로 자본 조달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는 자체 유동자금으로 충당할 예정이다. 이번에 상환하는 달러 영구채 5억달러는 현재 환율로 7000억원이지만, 환헤지를 해놓았기 때문에 필요한 자금은 2017년 발행 당시 환율 기준으로 5600억원이라고 회사 측은 밝혔다.
이 과정에서 금융감독원은 모호한 규정을 명확히 해 RP 발행에 물꼬를 터줬다. 흥국생명이 발행한 RP는 4대 시중은행이 매입할 예정이다. 금융당국과 업계의 공조로 급한 불은 껐지만, 흥국생명의 행태를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흥국생명 입장에서는 콜옵션을 이행하지 않아도 페널티로 현재 연 4.475%인 금리가 연 6.742% 수준으로 높아질 뿐이었다. 반면 콜옵션을 행사해 새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할 경우 연 12%가 넘는 상황이다 보니 미이행을 택한 것이다.
이 결정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콜옵션 행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한국 기업들이 발행한 신종자본증권을 사들였던 외국투자자들 사이에서 더 이상 한국물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급속도로 퍼졌고, 해외 발행 자체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시장이 혼란에 빠져 들었다. 업계 관계자는 "흥국생명이 자본 여력이 충분한데도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콜옵션 이행을 미뤘고, 보험 업계는 물론 대한민국 전체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렸다"면서 "이런 소탐대실이 없다. 이렇게 바로 상환할 수 있었다면 왜 진작 자금 마련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사태 해결 과정에서도 대주주 출자가 늦춰진 점을 놓고 많은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흥국생명은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지분 56.3%를 보유한 최대주주이고, 대한화섬과 티엔알 등 그룹 계열사들도 일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 태광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번에는 콜옵션을 이행할 자금 마련이 최우선이다 보니 태광그룹이 직접 출자하지는 않았다"면서 "앞으로 자금 사정을 봐가며 그룹 차원에서 자본 확충을 하게 될텐데, 그러면 어떤 형태로든 대주주와 계열사가 참여하게 되는 셈"이라고 해명했다. 다만 태광그룹과 계열사가 정확히 언제 자본 확충에 나설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업계에서도 대주주인 태광그룹과 계열사들의 출자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6월 말 기준 흥국생명 RBC 비율은 157.8%지만 최근 금리 인상 기조 등을 감안하면 이미 150% 밑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 관측이다. RBC 비율을 높이려면 추가 자본 확충이 불가피한 상황인 것이다.
이번에 흥국생명이 새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지 못한 것도 RBC 비율 때문이었다. 보험업 감독 규정에 따르면 자본성 증권의 콜옵션은 이를 상환한 뒤에도 RBC 비율이 150%를 넘어야 한다. 흥국생명은 당초 3억달러(외화표시)와 1000억원(원화)의 신종자본증권을 새로 발행해 이번 만기 콜옵션을 이행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이번에는 자금 마련 창구가 국내 시중은행과 보험사로 대체된 모양새다. 흥국생명은 지난 2분기 기준 자기자본이 1조9718억원이고, RBC 비율상 가용자본은 2조7734억원이다.
[신찬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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