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이 우리 곁에 함께하기까지…아이에게도 필요합니다 충분히 애도할 시간이[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어느 날 갑자기 ‘태연하게’ 찾아오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어른이나 아이에게나 절망과 고통, 외로움과 상실감을 안긴다
애도를 통해 영원한 부재인 ‘없음’과 대면할 때
‘없음’은 영원히 내게 ‘있는’ 세계로 재구성된다
‘없음’의 감각
“처음에는 이 일이 재미있게 시작되었다.” <작별인사>(구두룬 멥스·시공주니어·2002)는 이런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느 아침 깨어보니 비르기트 언니의 눈이 사시가 되었고 그걸 본 ‘나’와 언니는 큰 소리로 웃는다. 하지만 엄마는 새파랗게 질려 언니를 곧장 병원으로 데려갔고 그 후 언니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병원에 입원했고, 암 진단을 받았고, 수술을 했고, 암세포가 전이되어 세상을 떠났다. 첫 문장은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을 감춘 아이러니였다. 모질게도 죽음과 불행이 때로 그리 태연하게 다가오듯이.
‘나’는 갑자기 입원한 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어른들은 경황없이 움직이고 자신의 슬픔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른다. 어린이에게 알릴 정보의 내용과 수위를 신중히 가리는 상황에서는 어린이의 인식이 종종 제한받기도 한다.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한 나름의 행동이지만 어린이는 어른의 경험과 감정을 고스란히 공유하기 마련이다. ‘나’는 백과사전에서 찾아본 ‘암’이란 단어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면서도 언니의 병세에 대해서는 병원과 집을 오가는 아빠와, 부모님 대신 돌봐주는 할머니의 태도에서 짐작한다. 문득 무방비하게 터져버리는 아빠의 울음에서 절망과 고통을 감지한다.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은 제한될지언정 어린이 역시 고통에 동참하고 슬픔을 나눈다. ‘나’는 뇌수술한 언니가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모습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노란 털실 머리 인형을 선물하는 게 언니를 슬프게 할지 모른다고 생각할 줄은 안다. 언니의 눈으로 보고 언니의 마음으로 들어가 공감한다. 또 부모님의 슬픔을 알아보고 위로하는 법도 스스로 깨닫는다. 언니가 죽은 날 집으로 돌아온 엄마, 아빠와 포옹한 ‘나’는 가만히 물러나 혼자 잠든다. 엄마, 아빠는 지금 “너무나 슬프기 때문에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작별인사> 60면)고 여겨서다.
<작별인사>는 가족의 죽음을 겪는 어린이 주변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어린이에게도 상실의 고통이 비켜가지 않는다는 걸 담담하게 보여준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 숨기거나 죽음에 심오한 의미가 있는 듯 미화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 언제든 무심코 끼어드는 죽음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나’에게 언니의 부재는 현상을 감각하는 가운데 다가온다. 언니가 입원한 다음날 아침, 이상한 느낌에 놀라 잠이 깬 ‘나’는 언니의 텅 빈 침대를 보고서야 언니의 부재를 떠올린다. 밤마다 거친 숨소리가 들리던 침대가 잠잠할 때, 언니는 없다. 책을 읽기에 시끄럽던 방이 조용할 때, 언니는 없다. 그리고 이제 영원히, 언니가 없다. 영원한 부재인 죽음은 그러한 ‘없음’의 감각으로 찾아온다.
죽음 혹은 외로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대표작인 <사자왕 형제의 모험>(아스트리드 린드그렌·창비·1983)에서도 죽음이 두 형제를 갈라놓는다. 동생 카알은 심한 병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건 정말 너무하잖아?”(<사자왕 형제의 모험> 6면)라며 슬퍼하는 카알에게 형 요나탄은 죽은 후에 ‘낭기열라’라는 세계에 가서 신나는 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위로한다. 그러던 요나탄은 집에 화재가 나자 불길에 뛰어들어 카알을 업고 2층에서 뛰어내렸고 동생을 구하고는 숨진다. 혼자 죽음을 맞이할 일을 슬퍼하던 카알은 이제 혼자 남은 일을 슬퍼하다 어느 날 새하얀 비둘기에게 ‘낭기열라’로 오라는 형의 전언을 듣고 새로운 세계에서 형을 다시 만난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서 두 형제의 모험이 펼쳐지는 ‘낭기열라’는 선과 악이 투쟁하고 결국 선이 승리하는 판타지 세계다. 그런데 이 작품이 여느 판타지와 달리 특별한 점은 모험 이후 두 형제가 ‘낭기열라’에 머무르지 않고 죽음을 통해 ‘낭길리마’라는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요나탄은 용 카틀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카틀라의 불길에 닿아 몸이 마비되어 죽어간다.
카알은 다시는 형과 헤어지지 않고 어디든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한 뒤 죽음의 그늘도 없는 이상 세계인 ‘낭길리마’로 가기 위해 형을 업고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린다.
린드그렌의 전기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창비·2020)에는 작가가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상당히 고심했으며, 이 결말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나온다. 카알이 죽어가는 요나탄을 업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요나탄이 화재에서 동생을 구하려고 2층 집에서 뛰어내린 일을 연상케 한다. ‘낭기열라’의 모험을 통해 스코르판(빵이라는 뜻 - 필자)인 카알 또한 사자왕 요나탄의 사랑과 용기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불가사의하고 기묘한 결말”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반항 대신 자살을 권한다거나 환생을 설파하고 비밀 종교를 퍼뜨린다며 비난”(<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372면)받았다.
린드그렌은 결말을 고심하며 논란까지도 예상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렇게 마무리한 이유는 어린이가 생각하는 죽음 그리고 외로움을 고려해서다.
“어린이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버려지는 것이지요. 제가 이 책에서 조명하고자 한 것도 바로 그 점입니다. 스코르판이 느끼는 바로 그 두려움이요. 그는 형 요나탄과 함께라면 죽음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새드 엔딩이 아니라 해피엔딩입니다.” “두 형제는 새로운 세계로 함께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함께하지요. 어린이가 꿈꾸는 행복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382~383면)
관계맺음이 요구하는 애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마음의 근원은 어른도 마찬가지 아닐까. 타인과의 유대에서 안전감을 찾는 어린이로서는 버림받음과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크고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고 하지만 사실 모든 존재는 타인과의 관계로 구성되는 만큼 어른의 두려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만약 나의 죽음보다 사랑하는 타인의 죽음이 더 두렵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단절감에 있다. 죽음 자체가 지닌 공허와 미지보다는 죽음으로써 타인을 상실하고 홀로 남겨져 완벽하게 외로워질 일이 두려운 거다.
<그리운 메이 아줌마>(신시아 라일런트·사계절·2017)에서 심령 교회 목사를 찾아서라도 죽은 부인 메이를 만나고 싶어한 오브 아저씨의 마음이 그러했다. 메이와 오브에게 입양된 서머가 이제 둘만 남은 가족이 무너질까 걱정하며 아저씨가 기운을 차릴 때까지 자기가 살림을 꾸리겠다고 하자 오브는 대답한다.
“아가야,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사람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어. 우리를 두고 떠난 그 사람이 그립다는 생각만 하게 돼. 밭을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니다 보면, 아직도 그 가엾은 사람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꼭 그날처럼 내 심장이 얼어붙는단다. 다 끝난 일이건만, 난 그렇게 되지 않는구나.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어. (중략) 이 세상 누구도, 어떤 것도 내 생각을 메이한테서 떼어 놓지 못할 게다. 나도 그러기 싫단다. 어쨌든 나는 언제까지나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으니까.” (<그리운 메이 아줌마> 68~69면)
오브는 깊은 슬픔에 빠져 메이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완전한 애도 속에 머무르며 죽은 메이와 함께 있고만 싶어 한다. 애도만이 죽은 이와 만나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관계맺음이 있었기에 죽음은 늘 애도를 요구한다. 남겨진 이가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시간만큼 충분한 애도가 이루어져야겠지만 종종 현실은 애도조차 방해하기 일쑤다.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저씨와 나는 그저 트레일러 안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몇날 며칠이고 엉엉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짬도 없었다. (중략)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오브 아저씨와 나는 난데없이 사교계의 명사라도 된 듯했고, 그렇게 우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목놓아 통곡할 기회조차 빼앗기고 말았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틀에 맞춰 슬퍼하기를 바랐다.”(<그리운 메이 아줌마> 50~51면)
<그리운 메이 아줌마>에서 오브와 서머가 상실을 딛고 힘겹게 애도하기 시작하는 과정을 먹먹히 보고 있으면 <사자왕 형제의 모험>의 ‘낭기열라’는 카알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형 요나탄을 애도하기 위한 세계라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낭기열라’에서의 모험으로 상징된 애도 이후 카알은 비로소 ‘낭길리마’라는 새로운 장을 마주하고 요나탄을 감당하며 홀로 움직인다.
‘없음’이 새로 만드는 세계
그림책 <나와 없어>(키티 크라우더·논장·2022)에서도 죽음과 애도의 과정을 만난다. 엄마의 죽음 이후 아빠는, 엄마가 좋아한 꽃씨의 싹을 틔우던 헛간에 내가 들어가는 걸 싫어한다. 애도가 허락되지 않는 집에서 ‘나’는 상상 친구 같은 ‘없어’를 불러낸다. ‘없어’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내 옆에 ‘있다’. 중층적으로 해석되는 키티 크라우더의 여느 작품처럼 ‘없어’는 엄마, 엄마의 부재, ‘없음’의 감각, 상실감, 슬픔 등 여러 의미로 생각된다.
다만 ‘없어’가 나와 동떨어진 이질적인 존재로 보이지는 않는다. ‘나와 없어’라는 책 제목은 ‘나’ 그리고 ‘없어’를 동등하고 나란하게 연결시킨다. ‘없어’는 나의 결핍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나를 구성한다. 타인과의 관계로 내가 구성됐다면 타인의 부재 역시 나를 구성할 것이다. ‘없어’가 늘 내 옆에 있듯 죽음이 가져온 타인의 부재는 영원히 내게 ‘있다’. ‘없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없음’을 대면할 때 ‘없음’의 세계는 새롭게 구성되고 창조된다.
그 과정이 바로 애도다. ‘없음’의 감각을 계속 확인하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워 피하고 싶지만 기어코 헛간의 문을 여는 일, 헛간에서 엄마가 좋아하던 꽃씨의 싹을 틔워 땅에 심는 일, 무표정했던 아빠의 얼굴이 파란 꽃들이 피어난 집을 보고 환해지는 일, 다른 정원에까지 파란 꽃이 만발하길 꿈꾸는 일…. 우리가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은 그렇게 다시 태어나 우리 곁에 ‘없음’으로 함께한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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