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정훈이의 만화

이용욱 기자 2022. 11. 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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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부터 올해 3월까지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박물관에서 열린 ‘정훈이 만화, 영화와 뒹굴뒹굴 25년’전.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게슴츠레한 눈, 땜통이 있을 것 같은 상고머리, D라인 체형의 백수 남기남. 예수머리를 한 저예산 영화감독 씨네박. 씨네박은 남기남의 멘토를 자처하지만, 둘은 모두 어설프다. 영화주간지 ‘씨네21’에서 1996년부터 2020년까지 연재된 작가 정훈이(본명 정훈)의 ‘정훈이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그의 만화들은 기발한 상상력, 유쾌한 입담 등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활자매체의 시대, 씨네21 구독자들은 새 잡지를 받자마자 맨 뒤쪽의 정훈이 만화를 먼저 읽었다. 연재가 잠시 중단됐을 때 독자 항의가 빗발치자 씨네21 편집부에서 급히 작가를 불러왔을 정도였다.

영화 제목을 패러디했지만, 그의 만화는 영화 내용과는 관계없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한 유머를 넘은 세태풍자,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 생명력이 길고, 울림이 컸다. <동주>편에서 편의점 사장은 아르바이트 학생 남기남과 유통기한이 지난 샌드위치를 함께 먹으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유통기한 다 돼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한다. <남산의 부장들>편에서 취업준비생 남기남은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에 끌려왔다가 자신이 지원서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입사원서를 하도 여기저기 넣다보니 이 회사에 넣은 줄도 몰랐네요.” <클라우드 아틀라스>편에 등장한 이씨성의 명박왕은 고소영을 좌보, 강부자를 우보로 삼았으며, 성난 무리 수만명이 궁으로 진격하자 산성을 쌓고 농성했다고 묘사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실렸던 <분향>편에서 남기남은 자신의 방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제사상을 올리고, 울음을 터뜨린다.

정훈 작가가 백혈병 투병 중 50세의 나이로 지난 5일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씨네 21 외에도 여러 잡지에 만화를 연재했다. 의료매체 ‘청년의사’에 의사들의 세계를 담은 ‘쇼피알’을 20년간 장기 연재했다. 고인은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조롱해야 하는 실존 인물들, 정치인들을 풍자할 때도 오히려 좀 애정을 갖고 그려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같은 건데 그게 오래가는 것 같다”고 했다. 기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 그의 만화를 보면서 웃고, 때로는 위로받았다. 고인에게 감사하며, 명복을 빈다.

이용욱 논설위원 woo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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