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악마는 이태원에 가지 않았다

한겨레 2022. 11. 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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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이태원 참사]

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 들머리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글귀와 국화가 꽂힌 핼러윈 용품 등이 내걸려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세상읽기] 한승훈 | 종교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인간은 일상적인 인식 범위를 벗어나는 재난을 접하면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찾으려 한다. 합리적인 설명을 할 만큼의 충분한 정보가 없는 경우엔 초자연적인 이유라도 가져온다. 물론 절대적으로 옳거나 틀린 설명은 없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사건은 대단히 다양한 원인의 결과이고 대부분의 해석은 그 가운데 적어도 한 측면을 드러내거나, 일부 사람들의 마음이라도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설명은 있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방식이 그렇다. 이에 의하면 재앙이란 체제가 지시하는 윤리나 규범을 어긴 이들에게 내려지는 일종의 형벌이다. 안전하기 위해서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참사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공개적으로 피해자와 유족들을 모욕하고 그들의 죽음이 자업자득이라는 식의 망언을 뱉었다. 왜 “우리 명절도 아닌 외래문화”에 빠져서 “반기독교적”인 축제에 갔다가, 혹은 가족으로서 말리지 않다가 그런 일을 당했냐는 식이다. 전자는 기성세대에게서, 후자는 개신교 배경의 인사들에게서 참사 이전부터 꾸준히 나왔던 핼러윈 축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표현하면서도 “거봐라, 내 말 안 들으니까 그렇게 된 거 아니냐”는 속내를 끝내 숨기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었음에도 충분한 조처를 하지 않은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형태의 설명도 있다. 그들을 벌한다고 해서 이미 벌어진 재앙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더는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정당한 방법이다. 책임을 지는 것은 왕조 시대부터 통치자들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였다. 공화정 체제에서도 최고의 권력은 곧 최대의 책임을 의미한다. ‘관료제’는 책임의 소재를 체계적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그 원리에 따르면, 조직의 아래에서는 일을 하고 위에서는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 그러나 그로부터 파생된 ‘관료주의’의 사유 방식에 의하면, 위에서는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문제가 생기면 아래에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가장 좋은 설명은 구조의 문제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원인이 구조적이라면 그것을 뜯어고침으로써 미래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외양간이 미비해서 소를 잃었다면 소를 탓하거나 목장 주인의 어리석음을 욕하기보다는 늦게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편이 낫다. 물론 그것은 그 구조를 조직하고 운영한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과 병행될 수 있다.

희생양 이론으로 잘 알려진 르네 지라르는 말년에 자기 사상에 기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입혔다. 후기작인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그는 1세기께 종교 지도자인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아폴로니우스)가 일으킨 “기적” 사례를 소개한다. 에페소스에 페스트가 유행하자 아폴로니오스는 자기가 병을 몰아내겠다며 시민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극장 한구석에 앉아 있는 불쌍한 거지에게 다 같이 돌을 던지라고 지시한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사람들도 몇몇 사람이 던진 돌을 무기력하게 맞던 거지가 증오의 눈빛을 드러내자, 그가 재앙을 가져온 악마라는 것을 확신하고 다 같이 돌을 던져 죽인다.

지라르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문명이 사회적 위기를 처리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공동의 악을 지정하기로 합의하면 사회는 통합되고 갈등은 봉합된다. 참사 이후 정부가 당시 군중을 밀었다는 혐의를 받는 인물을 색출해 조사하면서 그 과정을 언론에 흘린 것이 전형적인 사례다. 그런데 지라르는 여기에 예수를 대비시킨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는 군중을 말리고, 그 자신도 마찬가지의 메커니즘에 의해 부당하게 살해된다. 이른바 “십자가의 승리”라는 것은 희생양을 이용해 유지되는 평화의 허구성, 나아가 악마성을 폭로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지라르의 주장 전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개인에게 재앙의 책임을 돌리는 체제야말로 ‘악마’의 정체라는 통찰은 마음을 울린다. 나는 한 개신교인 작가가 온라인에 올린 게시물을 보고 이 칼럼의 제목을 정했다. 그에 의하면 참사 피해자들은 다음날 교회에 갈 생각은 않고 토요일 밤에 모여 모종의 악마 숭배에 가담했다가 변을 당했다. 천만에, 악마는 이태원에 가지 않았다. 다음날 교회에 가면 (피해자들과는 달리)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신들의 운명에 기뻐하는 자기 추종자들의 찬양을 받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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