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낙하산 떠난 자리에 다시 낙하산
반년 넘게 공석이었던 보험개발원장에 허창언 전 금융보안원장이 선임됐다. 허 원장은 윤석열 대통령과 서울대 법학과 79학번 동기로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전임 원장의 임기 종료와 대선이 맞물리면서 반년 넘게 끌어온 인선 과정을 생각하면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결과다.
보험개발원과 함께 수개월째 수장 자리가 공백 상태인 보험연구원은 여전히 신임 원장을 찾지 못하고 있다. 보험연구원의 새 수장 선임 과정이 6개월 넘게 지연되고 있는 것은 금융당국의 개입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보험연구원은 지난 3월 차기 원장 선임을 위한 절차를 진행 중이었지만 금융위원회의 요청으로 중단했고 지금까지도 지연되고 있다.
내부 출신인 안철경 원장의 연임 의지가 강하지만 최근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윤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전우현 한양대 로스쿨 교수가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현 정권의 인수위원회에 참여했던 인사들 몇몇도 거론되고 있다. 자리에 앉힐 '낙하산 인사'를 찾지 못해 인선이 지연되고 있다는 추측이 괜히 나오는 건 아닐 것이다.
특히 보험연구원은 금융위 산하기관인 보험개발원과 달리 민간연구기관으로 분류된다. 금융당국의 입김이 민간기관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은 앞으로 금융권에서 벌어질 대대적인 낙하산 인사를 예고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때마침 금융권에는 대규모 인사태풍이 예고된 상태다. 국내 주요 금융지주를 비롯해 국책은행, 지방은행 등은 연말 연초에 최고경영자(CEO)의 임기가 줄줄이 만료된다. 현재 차기 행장 공모 절차가 진행 중인 수협은행도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고 있다. 김진균 현 행장을 비롯해 수협 출신 인사가 4명이나 차기 행장에 도전했지만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정부가 외부 인사를 고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재공모를 진행해 외부 인사 2명을 새롭게 후보군에 합류시켰다. 보험개발원장 자리를 두고 허 원장과 경쟁하다 고배를 마신 신현준 신용정보원장도 그 중 한명이다.
금융위가 라임펀드 사태와 관련해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에 대한 제재에 다시 착수한 것도 차기 회장 선임 시기와 맞물리면서 의혹을 사고 있다. 지난 3일 금융위는 안건소위 심사에 라임사태 관련 제제 사안을 올렸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손 회장은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손실에 대한 금감원 중징계에 불복해 제기한 행정소송도 진행 중이다. 1,2심에서 모두 승소했지만 금감원이 상소를 제기하면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당초 금융위는 DLF 소송에 대한 최종 결과가 나온 이후에 제재 심사에 착수할 것으로 예상됐었다. 갑작스럽게 제재 심사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배경이 궁금할 뿐이다.
지방금융지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BNK금융지주의 경우 김지완 회장이 임기가 5개월가량 남은 상황에서 자진사임했다. 김 회장이 BNK금융 계열사를 동원해 아들이 다니는 회사에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탓이었다. 이와 관련해 금감원이 현장검사에 나섰고 김 회장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김 회장이 사임하면서 BNK금융은 차기 회장 선임 절차에 돌입했다. 그런데 그룹 회장을 내부 출신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백지화했다. 낙하산 인사에게 길을 열어준 셈이다.
BNK금융이 내부 인사로 CEO 승계 자격을 제한하는 규정은 김 회장이 취임한 이후 만들어졌다. 김 회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상고 동문이고,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제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연히 낙하산 인사로 분류됐지만 정작 자신 이후에는 BNK금융에 외부 인사가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했다. 낙하산을 막겠다는 조치였지만 스스로 낙마하는 빌미를 만들었다.
해당 규정에는 대표이사 회장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그룹 평판리스크를 악화시킨 경우 외부인사와 퇴임 임원 등도 회장 후보군에 포함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외부 인사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는 김 회장의 불명예 퇴진이 필요했던 셈이다.
낙하산이 떠난 자리에 또 다시 낙하산이 내려오는 모습이다. 정권교체에 따른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 윤 대통령의 후보 시절에 지지선언을 한 금융인들이 한자리씩 차지하는 모습은 씁쓸함을 키운다. 낙하산이라도 최소한 해당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인물이 선임되길 바랄 뿐이다.
강길홍 금융부동산부 기자 slize@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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