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도의 음악기행 <66> 쇼팽이 사랑한 피아노, 플레이엘(Pleyel)] 시적이고 영롱한 빛의 소리…1800년대가 추구한 미학

안종도 2022. 11. 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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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단 두 대밖에 없는 플레이엘 피아노. 마요르카 발데모사 차터하우스에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한창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프레데리크 쇼팽(Frederic Chopin)의 음악만큼 필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또 슬프게 한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그의 곡을 잘 연주하고자 한 열망은 대단했다. 피아노로 그의 작품을 쉴 새 없이 쳐 댔고, 나머지 시간에는 휴대용 CD 플레이어로 그의 음악을 종일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들었고, 그의 전기도 읽어 봤고, 그의 작품을 작곡 선생님께 가져가 함께 분석해보고 또 음악 미학 서적까지 사서 읽었다. 물론 일부 책은 너무 어려워 몇 페이지만 읽고 책장 안에 고이 넣어 뒀지만 말이다.

그의 전기를 읽는 도중 이런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가 한 편지에서 언급한 구절인데 대략 내용은 이렇다. “내가 집중할 수 있고 내 손가락의 컨디션이 좋다면, 나는 플레이엘(Pleyel)의 피아노에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한다. 내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 해머에 직접 닿는 것 같이 느껴지고 이에 내가 원하는 감정과 느낌을 정확하게 악기에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 외에도 쇼팽의 전기를 읽으며 가장 자주 눈에 마주친 단어는 상드 그리고 플레이엘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조르주 상드야 쇼팽 삶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뮤즈의 역할을 한 연인이라 당연하다 싶지만, 플레이엘은 그의 삶에서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플레이엘은 쇼팽이 살아 있었을 당시 에라르와 더불어 프랑스 및 유럽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했던 프렌치 피아노 메이커다. 창립자인 ‘이그나츠 플레이엘(Ignaz Pleyel)’의 이름을 따 상호를 지었고 아름다운 소리로 수많은 음악가에게 사랑받았다고 한다.

필자도 플레이엘 피아노를 쳐본 경험이 있다. 10대 후반 오스트리아에서 유학 시절 수도 빈(비엔나)에 놀러 갔었다. 그때 길거리에서 발견한 한 피아노 판매점에 들어가 이 피아노 저 피아노를 구경하던 중 구석에 거의 방치된 듯한 한 옛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평상시에 만나던 천편일률적인 검은색 피아노와는 다른 디자인이었기에 눈에 띄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악기는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는지 피아노 건반을 눌렀을 때 공포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음산한 쇳소리가 났다. 얼마나 놀랐으면 그 소리의 느낌과 질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쇼팽이 왜 이런 피아노를 선호했는지 당시 이해할 길이 없었다. 어쩌면 그 당시는 지금보다 기술이 뒤처져 그 정도 수준의 피아노를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현대 피아노는 훨씬 진보된 기술로 완성된 더욱 문명화된 피아노가 아닐까 생각했다. 곧 플레이엘이라는 이름은 필자의 머릿속에서 흐릿해졌다.

이후 10년이 지나 오스트리아를 떠나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에 진학해 공부할 때였다. 음대에서 고악기 컬렉션으로 유명한 함부르크 예술 산업 박물관과 협업해 박물관 전시실에서 컬렉션 악기로 연주회를 개최했었다. 필자는 당시 지도 교수의 추천으로 연주에 참여했다. 그때 플레이엘 피아노를 10년 만에 다시 만났다.

플레이엘이 만든 쇼팽의 마지막 피아노가 바르샤바 프레데리크 쇼팽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쇼팽은 이 피아노를 1848~49년에 연주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박물관 관람 시간이 지난 늦은 밤, 연주하는 학생들에게만 개방된 전시실에서 노란색 백열전구 밑에 조명을 받아 조용히 빛나던 피아노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1847년에 제작된 플레이엘 그랜드 피아노가 오리지널 상태로 있었고 지금도 연주할 정도로 악기 관리가 아주 잘 된 상태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조심스럽게 건반 위에 올려 눌러보았다. 10년 전 빈에서 들었던 음산한 소리와는 너무도 달랐다. 부드러운 가운데 영롱한 빛이 소리에서 느껴졌다. 또 현대 피아노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저음역부터 고음역까지 소리 질감의 큰 변화 없이 매우 고른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눈에 띄었다. 신기한 마음에 연신 피아노 건반을 눌러보는 필자를 지켜보던 박물관 큐레이터는 악기가 혹여나 망가질까 걱정됐는지 여러 차례 최대한 조심스럽게 살살 눌러달라고 요청했었다.

창립자 이그나츠 플레이엘은 현재 와인 생산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루페르슈탈(Ruppersthal)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악기 연주와 작곡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후원자의 추천으로 하이든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꽤 걸출해 모차르트 또한 높은 평가를 해줬다고 한다. 이후 스트라스부르그를 거쳐 파리에 정주했고 그곳에서 탁월한 사업적 기질을 발휘해 차린 출판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에는 1807년 자신의 이름을 따 피아노 악기 제작사도 차렸다.

당시 유럽 최고의 피아노 메이커로 꼽히던 에라르에 견줘도 결코 밀리지 않을 만큼 대등한 경쟁 관계를 형성했고 쇼팽뿐 아니라 동시대 멘델스존, 클라라 슈만, 또 이후 드뷔시, 라벨 같은 최고 음악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쇼팽과의 관계가 특별하다. 파리에서 쇼팽의 공식적인 첫 독주회와 마지막 독주회가 바로 플레이엘 살롱, 플레이엘 콘서트홀에서 플레이엘의 악기로 열렸기 때문이다. 플레이엘은 스페인 발데모사, 프랑스 노 앙, 파리 등 쇼팽이 기거하는 곳마다 피아노를 보내며 협찬했다. 쇼팽은 그 악기 앞에서 작곡에 매진하며 수많은 명곡을 발표했고 이후 플레이엘은 쇼팽의 명성으로 더 많은 악기 판매를 할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이보다 더 좋은 협력은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올해와 작년 다시 한번 이 악기를 제대로 쳐볼 기회가 있었다. 네덜란드의 고악기 전문가 선생님 댁을 방문했는데 그곳 살롱에 놓여있던 1850년도산 플레이엘을 예전 박물관에서처럼 눈치 볼 필요 없이 실컷 쳐보며 이 악기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현재 필자가 이해하는 플레이엘 피아노는 현재보다 덜 진보한 구식 피아노가 아닌 시적이고 부드러우면서도 영롱한 소리를 원했던 당시 시대가 추구한 미학이 완벽히 반영된 악기라는 것이다.

plus point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반
쇼팽
피아노 플레이엘 1843 & 피아니노 플레이엘 1834
(PIANO PLEYEL 1843 & PIANINO PLEYEL 1834)
피아노. 크누트 자크(Knut Jacques)

쇼팽이 생전에 보유했던 1843년도산 플레이엘 그랜드 피아노와 1834년도산 플레이엘 업라이트 피아노로 쇼팽의 작품을 녹음한 흥미로운 앨범이다. 감상하면서 당시 이 피아노로 실제 자기 작품을 쳤을 쇼팽을 생각하며 들어 보는 것도 큰 재미일 것이다.

쇼팽 시대 플레이엘 그랜드 피아노와 현대 그랜드 피아노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바로 피아노 현의 정렬 방식이다. 당시 플레이엘 피아노는 모든 현이 병렬로 나열돼 저음역부터 고음역까지 현 길이뿐만 아니라 소리 또한 대체로 고른 크기와 질감을 표현한다. 이에 비해 현대 그랜드 피아노는 19세기 중엽 스타인웨이가 적용한 교차현 방식을 통해 저음역의 현과 고음역의 현이 서로 교차하며 거치된다. 같은 피아노 사이즈에도 조금 더 긴 현을 장착할 수 있고, 저음역 현이 피아노 향판 중앙부 브리지에 조금 더 가깝게 거치돼 더욱 풍부한 울림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옛 플레이엘 피아노와 비교해 저음역이 상당히 강력한 소리를 내 고전 및 낭만 초기 작품을 연주하는 것에 있어 연주자에게 각별한 주의를 요구하기도 한다.


▒ 안종도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연주학 박사, 전 함부르크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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