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9>] 영국 총리 사퇴가 보여준 정치경제학의 회귀

신상준 2022. 11. 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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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현지시각) 다우닝가 10번지에서 고별 연설하는 리즈 트러스(왼쪽) 전 영국 총리와 같은 자리에서 대국민 연설하는 리시 수낙 신임 영국 총리. 사진 EPA연합·UPI연합
신상준 한국은행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서울시립대 법학 박사,‘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경제학의 원래 이름은 정치경제학이었다. 이를 방증하듯 애덤 스미스의 계보를 잇는 고전파의 아버지들은 ‘정치경제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라는 동일한 제목의 책들을 출간했다. 1817년 리카르도, 1820년 맬서스, 1848년 밀(J. S. Mill)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대가들의 텍스트는 오늘날의 조잡한 경제학 교재들과 달리 수학 공식 하나 없이 만연한 산문 형식으로 쓰여 있고, 특히 철학자 밀의 경우 풍부한 수사와 장엄한 어조가 일품이다. 이들이 살던 시대에는 정치학, 경제학, 윤리학이 명확하게 분리돼 있지 않았다. 이들은 상호 영향을 미치며 하나의 신념 체계로 작용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신념 체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는 집권 44일 만에 사임해 영국 역사상 최단기 총리로 기록됐다. 자신은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이라던 트러스가 사임한 이유는 무엇일까? 

트러스는 1980년대 마거릿 대처를 연상시키는 경제정책, 즉 ‘부유층 감세’와 ‘작은 정부’에 대한 비전을 갖고 당내 경선에 임했고, 쿼지 콰탱과 연합전선을 형성해 총리 자리를 차지했다. 그녀는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대규모 감세안을 담은 정부 예산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예산안에는 대처의 경우와 달리 정부지출 삭감방안도 구체적인 예산명세도 없었다. 디테일은 악마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측하지 못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리스크의 전이

영국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연금의 부채위험, 즉 연금 기금 부담이 커졌다. 다만, 지난 수십 년간 영(0)에 가까운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면서 부채연계투자(LDI)라는 묘안을 찾아냈다. 파생상품을 이용해 저금리 자금을 차입한 후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식이다.

LDI 전략을 사용하던 영국 연기금들은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으로 자산가치가 하락한 상태에서, 트러스 전 총리가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하자 녹아웃돼 버렸다. 트러스의 계획에 의하면 세입은 대폭 축소하되 지출은 축소하지 않기 때문에 대규모 국채 발행이 불가피하다. 2023년 중 국채의 순 공급 규모는 2010~2019년 연평균의 6배 수준인 3000억파운드(약 504조원)로 예상됐다. 영국 국채의 공급 급증 및 국가신용도 하락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국채금리가 급등(국채 가격이 급락)하게 된다. 연기금이 레버리지(빚투)로 끌어모은 자산가치가 급락하자 증거금(보증금)이 부족하게 되고, 연기금이 증거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투매하자 다시 국채금리가 상승(국채 가격이 하락)하게 되고, 다시 마진콜(보증금 추가납부 부담)이 발생하게 된다. 결국 영국 중앙은행이 무제한 국채 매입을 시도하면서 시장 불안이 진정됐다. 하지만 이로 인한 여진이 남아 있다.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설이 나도는 가운데 영국과 보수당 정권이 치명상을 입었고, 자신만만하게 자이언트 스텝을 밟던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도 영국과 유사한 금융시장 붕괴가 미국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투자은행 이곳저곳에 귀동냥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국왕 폐하의 총리

결국 제2의 대처를 꿈꾸던 트러스는 국왕 찰스 3세를 알현하고 사임 허가를 받은 후 총리관저를 떠났다. 영국은 군주제 국가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나마 국가의 주권이 군주에게 남아 있다. 주권자이자 국가 원수인 군주는 총리와 장관을 임명한다. 영국 정부의 공식 명칭은 ‘국왕 폐하의 정부(HM Government)’이고 야당은 ‘국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반대자’이다. 영국의 입헌적 전통에 따라 정부의 권한은 주권자인 군주로부터 나온다. 물론 총선거에서 승리한 다수당 대표가 총리 후보가 되는 전통에 따라 군주의 임명권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권한에 그친다. 영국 정부는 국왕의 정부이지만, 그 존립은 하원의 신임에 의존한다. 

영국은 헌법적 전통에 따라 하원에서 최대의석을 가진 정당 대표가 정부를 구성한다. 2022년 9월 말 현재 영국 하원은 전체 의석 650석 중 보수당 357석(54.9%), 노동당 196석, 스코틀랜드 국민당 44석, 자유민주당 14석, 기타 정당 및 무소속 39석의 의석 분포를 보이고 있다. 원래 당 대표를 뽑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당 대표 경선에 나서기 위해서는 20명 이상 동료 의원의 추천이 있어야 하고, 경선자가 여럿인 경우 동료 의원들의 투표를 거쳐 후보를 2명으로 압축한 뒤, 최종적으로 17만2000명의 권리당원들이 온라인 투표를 통해 당 대표를 결정한다. 하지만 상황의 엄중함 때문인지 10월 20일 보수당 선관위는 입후보 요건을 동료 의원 20인 추천에서 100인 추천으로 바꿨고, 리시 수낙만이 이 요건을 충족함에 따라 10월 24일 수낙은 의원투표, 당원투표 없이 당 대표로 선출됐다.


정치경제학의 회귀

영국 국민은 트러스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보수당의 무능에 분노하고 있다.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63%가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원한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치르지 않는 것일까. 2011년 고정회기법에 따라 총선은 5년마다 5월 첫째 주 목요일에 실시하는데 다음번 총선은 3년 후인 2025년으로 예정돼 있다.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하원에서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조기 총선안을 가결하거나, 하원에서 다수결로 정부 불신임안을 통과시켜야 하는데, 현재 보수당이 의석의 54.9%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조기 총선이 불가능하다. 영국 노동당 대표인 키어 스타머가 “정치는 토리(Tory)의 막장 드라마가 아니다. 내일 당장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2025년까지는 보수당의 집안 잔치만 벌어지게 된다. 

바야흐로 정치경제학의 시대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지방정부 한 곳이 지급보증채무의 이행을 거절했다가 채권시장 전체가 혼란에 빠진 일이 있다. 전국의 지자체들은 춘천레고랜드, 완주테크로밸리, 천안BIT일반산단, 전남세풍일반산단, 음성용산산단, 충주드림파크, 안동바이오산단 등 크고 작은 지역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자체 하나가 부도나면 모든 지자체에 부정적 효과가 미치고 결국 금융시장 전체에 부정적 영향이 퍼지게 된다. 일찍이 칼 슈미트는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분(Unterscheidung von Freund und Feind)’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정치는 경제가 되고, 경제는 다시 적과 동지의 구분이 불가능한 악마의 디테일이 돼 버렸다. 정치경제학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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