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 “초격차 기술에만 그쳐선 안 돼···대체 불가능한 시장 창출해야 생존”
위기의 산업·연구개발···미래 신시장 창출 능력 확보해야
세계화 종언·가치동맹 재편, 주요국들의 ‘파트너 국가’로
5~10년 뒤 국가비전 안 보여, ‘프로젝트매니저’ 도입해야
産學硏政, 추격자 벗어나 선도국 마인드로 대전환할 때
“국가전략기술을 어떻게 개발하겠다는 것보다 먼저 어떤 시장을 만들겠다는 것을 목표로 둬야 합니다. 초격차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사실 대체 불가능한 기술과 시장을 먼저 염두에 둬야 하고 인재 양성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장석권(66·사진) 한국공학한림원 산업미래전략위원장 겸 KAIST 초빙석학교수는 7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 시대에 어느 나라에나 대한민국을 파트너로 삼고 싶은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국가전략기술이 경제와 외교·안보까지 좌우하는 상황에서 대체 불가능한 기술과 상품·시장을 창출하는 능력을 확보해야 미래 성장 동력을 키우고 국가를 생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국내 방산 업체들이 폴란드에 전차·자주포·경공격기·다연장로켓 등 약 50조 원어치의 방산 물자를 수출하기로 한 것이 자연스레 현지 원전 건설 프로젝트 참여로 이어지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장 위원장은 “산업 정책과 연구개발(R&D) 정책에 대한 정부의 비전과 리더십이 부족해 당장 몇 년 뒤를 장담할 수 없다”며 “과학기술과 관련된 대규모 예비타당성 검토를 할 때 시장 창출을 염두에 두고 국가 R&D 대혁신을 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 패권 다툼 시대에 어떻게 산업 전략을 세워야 하나.
△조선·철강과 정보통신 등 성숙기로 넘어가는 산업군이 많다. 반면 신(新)산업군은 아직 덜 컸다. 둘의 간극이 벌어지면 추락한다. 굳은 살을 잘라내야 새 살이 나온다. 선제적 구조 조정을 통해 산업구조를 전환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기로 했는데 좀 더 빨랐어야 했다.
-정부가 국가전략기술 육성을 강조하는데 시장 창출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는가.
△윤석열 정부는 전(前) 정부가 전략산업으로 설정한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10대 분야에다 차세대 소형모듈원전(SMR)과 첨단 모빌리티 등을 합쳐 12대 분야 50개 세부 중점 전략 기술을 제시했다. 앞으로 5년 동안 관련 R&D에 25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선도 그룹에 있는 것도 있지만 대체로 경쟁형이거나 추격형 기술이 많다. 그래서 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하지만 시장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문화 상품이나 의료 서비스, 스마트시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대한민국이 미래 산업의 전시장 역할을 해 산업 유발 효과를 크게 거둬야 한다.
-정부가 과학기술 분야의 대규모 예비타당성을 검토할 때 미래 시장을 예측해야 할 텐데.
△6G 예타 규모가 1조 원가량인데 속도만 빠르게 하면 뭐하겠는가. 미래 시장을 잘 그려야 한다. 주요 과학기술 R&D 중 30%정도는 듣도 보도 못한 R&D를 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정부가 칩4 동맹이나 미국의 ‘반도체와 과학법’ 등 여러 현안들을 챙기면서 미래 시장이 어떻게 될지 판단하고 지원해야 한다. 차세대 스마트폰·컴퓨팅의 부상을 염두에 두고 반도체 R&D를 하는 등 제품 기획을 해야 한다. 미래 세상을 바꾸는 토털솔루션을 얘기해야 하는 것이다. 초소형 SMR R&D 기획도 친환경 탄소 제로 도시나 원자력잠수함 등 수요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과거 버스와 지하철을 연계한 교통 시스템을 구축해 스마트카드 수요를 만든 것이 한 예다.
-산학연정(産學硏政)이 모두 ‘패스트팔로어(빠른 추격자)’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쫓아가는 성향이 강하다. 산업 정책 중 큰 부분이 R&D인데 우리가 최초로 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지난해 말 공학한림원에서 메타넷(MetaNet) 등 G5 메가프로젝트를 제안했는데 산업통상자원부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에서 반응이 없었다. 당시 10~20년 뒤 세상을 주도하겠다는 의미가 담겼는데 아쉬웠다.
-G5 메가프로젝트를 다시 소개한다면.
△메타넷은 메타버스에서 교육 훈련·상거래·근무·미디어 등을 편리하게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에너지·환경 정책을 규제 중심에서 진흥으로 전환하는 한편 탄소 중립화 과정에서 창출되는 글로벌 파생 시장을 활용하는 방안도 담았다. 차세대 모빌리티 선점을 위한 그린 금융과 정부 구매 활성화 등도 제안했다. 이 프로젝트들을 기반으로 스마트시티를 건설해 세계적 롤모델을 만들자는 내용도 있다.
-정부가 국가전략기술 육성을 위해 대형 R&D 과제 기획·추진에 속도를 내기로 했는데.
△오랫동안 지체됐던 한국형전투기(KFX) 과제라든지 조 단위 R&D 기획도 많다. 양자기술도 2조 원 단위로 예타를 수립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군사 분야나 양자기술이나 5G·6G, 인공지능(AI), 우주 등 모두 쫓아가는 것들이다. 우리가 선도한다고 하는 통신 분야의 경우 삼성전자 통신 장비 점유율을 보면 우리가 5G 주도권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6G도 마찬가지다. 양자 기술은 미국과 중국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처져 있다. 정책 당국자들이 책임 회피나 자신감 부족 등으로 쫓아가기만 한다. 정부의 국장급 이상이 프로젝트매니저(PM)를 맡도록 하되 성과가 나올 때까지 바꾸지 않는 책임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지금의 공무원 순환 보직 시스템으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 대형 R&D는 정부와 기업이 힘을 합쳐 해야 한다.
-공학한림원이 지난해 청와대에 산업미래전략실을 만들자는 제안도 했는데.
△이제는 세계화 시대가 끝나고 가치 동맹으로 재편되는 등 게임의 룰이 완전히 바뀌었다. 컨트롤타워와 싱크탱크가 중요하다. 범부처 기능을 아우르는 조직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도 제안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국가 어젠다를 다루는 위원회가 필요하다. 범부처 차원에서 정보를 수집해 비전과 전략을 짜서 조정하고 임무를 부여해 실행에 옮기게 하는 곳이 없다. 지금은 각 부처가 다 따로 놀고 기업과도 협업이 잘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의 산업과 R&D 정책 리더십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많이 아쉽다. 대통령에게서 ‘나를 따르라’는 방향성이 눈에 띄어야 하는데 2030년, 아니 2025년에도 어떤 세상을 만들겠다는 게 잘 보이지 않는다. 후륜구동차처럼 뒷바퀴에 밀려서 가는 모양새이다. 전륜구동차처럼 앞에서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목표와 지향점을 메시지로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중국만 해도 ‘제조 2025’라든지 10~15년 앞을 보고 계획을 세우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다. 과거 정부3.0위원회만 해도 총괄 기획은 커녕 갈등을 조정하다가 끝났다. 정부 실국장 등 간부들에게 산업 전략이든 R&D 전략이든 비전을 주고 임무에 성공하면 확실히 보상해줘야 한다. 1년~1년 반이면 바뀌는 순환 보직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3~5년간 국책 과제에 대해 책임지게 하고 파격적 평가 시스템을 적용해야 한다. 부처 간 협업을 하는 태스크포스에도 힘을 실어줘야 한다. 지금은 예산 확보에만 신경을 쓰고 성과에는 관심이 없다.
-국가 R&D의 주요 축인 정부 출연 연구기관은 어떻게 혁신해야 하는가.
△출연연은 실상 경쟁력이 별로 없고 연구원들도 기가 죽어 있다. 연구원들 중 제대로 일하는 사람은 40% 정도 될 것이다. 정부가 절반가량 출연금을 주며 너무 컨트롤한다. 나머지 절반의 예산은 대학 연구실과 경쟁해 과제를 수주한 뒤 인건비를 충당하는 구조인데 성과물이 크지 않다. 출연연 등 국책 연구소가 과제를 자발적으로 제안하게 해서 그것에 목숨을 걸게 만들어야 한다. 연구원 간 경쟁 시스템을 만들고 각 연구원장 책임하에 대형 과제를 스스로 기획해 추진하게 해야 한다. 필요 인력도 채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국내외 교육 훈련도 보내줘야 한다. 연구 과제 평가·관리 시스템도 비전문가가 아니라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연구자가 보고서를 쓰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해야 한다.
-정부의 연구 과제가 너무 쪼개져 있어 나눠 먹기 식이라는 지적도 많다.
△그런 문제는 고쳐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경쟁 체제를 도입해 성과를 내는 것이다. 차세대 스마트폰 개발을 예로 든다면 A·B·C 세 연구팀에 과제를 줘 경쟁시킨 뒤 비교해서 부실한 팀을 기존의 잘하는 팀에 합치든지, 아니면 아예 없애고 재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국회에서 유사·중복 연구를 자꾸 예산 낭비라며 없애라고 하는데 오히려 비슷한 과제를 줘 경쟁을 시켜야 한다. 독점하면 안 된다. 퀄컴의 경우 R&D 과제를 줄 때 동일 과제를 3개 만들어 내부 2팀과 외부 한 팀에 부여하더라. 이동통신에서 CDMA 표준화 특허도 당초 경쟁에서 탈락한 팀이 퇴사해 창업한 뒤 더 뛰어난 기술을 개발하자 이들을 다시 불러들여 성공시킨 것이다.
-대학의 R&D와 인재 양성에 대해서도 사회적 질타가 많은데.
△대학은 R&D 자금을 받아 논문을 쓰다가 끝나는 경향이 있다는 게 불편한 진실이다. 출연연에 비해 미국 연구소와 대학에 있다가 온 교수들도 많아 유리한데 그렇게 큰 성과를 내지 못한다. 영향력이 큰 특허가 많지 않다. 연구장비와 노하우가 사장되는 문제를 고치려면 성과가 뛰어난 교수의 정년을 늘려줘야 한다. 다만 대학은 R&D 자금을 받아 70%가량은 인재 양성에 쓴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특히 비빔밥처럼 다양한 유형의 학교 운영과 교육실험을 허용하고 도전하고 모험하는 기업가 정신 함양에 초점을 맞추게 해야 한다. 산학 협력 증진 차원에서 기업이 학교 교육에 같이 참여하면 정부가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He is···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KAIST에서 산업공학 석사 학위와 경영과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를 지냈다. 한국경영정보학회 부회장, 한국미디어경영학회장, 정보통신정책학회장, 한국경영과학회장을 역임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글로벌어젠다카운슬 위원, 미국 싱크탱크인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의 자문위원(affilated expert) 등 글로벌 전문가로도 활동했다. 정보통신부 정책심의위원, 정부 3.0위원회 클라우드 전문위원장 등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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