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 있는 성(城)
이 가을에 나는 두 개의 성(城)을 보았다. 성은 울긋불긋 가을빛 속에서 고즈넉하거나 숨죽이거나 했는데 그것은 세상의 끝에 가파르게 매달려 있었다.
1500년대 말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이들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다양한 기원을 가졌기 때문일 텐데, 이들 중 대다수는 여진족이었지만 일부는 중국 북부나 몽골 또는 조선 출신이기도 했다. 이들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은 모호하였으나 사회 제도적 관점에서 ‘팔기(八旗·jakun gusa)’라는 독특한 구조가 있었다. 이 ‘여덟 개의 깃발’은 군사 조직이었고, 이를 중심으로 여진족 몽골족 한족 퉁구스족 조선족 등의 집단으로 분류되었다. 누르하치(Nurgaci)는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급료와 보급품, 토지를 하사했다. 그는 광대한 만주벌판에 흩어져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세력들을 끌어모아 여덟 개의 깃발로 구성된 병영 국가를 구축했다.
누르하치는 초원지대에서 발흥한 다른 칸(汗)들과 마찬가지로 지능과 화술, 민첩성과 체력이 뛰어났고 무엇보다 180㎝가 훌쩍 넘는 키는 어디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그는 명나라를 배반한 여진족을 죽여 충성심을 표시한 대가로 1583년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지방군 지휘관의 벼슬을 받는다. 그는 이 직책을 적극 활용하여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능력만 있다면 누르하치 아래에서 높은 지위로 출세할 수 있다는 소문이 중국과 조선의 변경지대까지 알려진다. 각지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흘러들어왔고 이들은 ‘팔기’ 체제 안으로 편입되었다. 누르하치는 그들의 정신적 물질적 아버지이길 자처했고 다양한 출신의 그들을 장차 만주족의 정체성으로 거듭나게하는 초석을 깔았다.
누르하치의 여진족은 명나라와 조선에 값비싼 천연재를 수출하였고, 그들 중 농업 전문가들은 만주 벌판의 비옥한 들판에 밀과 수수를 대규모로 경작하였고, 인삼 가공과 옷감 염색에 산업적 기밀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강력해졌으며 세력권은 확대되기에 이른다. 누르하치의 발흥에 위협을 느낀 조선은 무관 신충일(申忠一)을 급파하여 정탐한다. 신충일이 누르하치의 본진을 방문한 것은 1595년부터 1596년 사이의 겨울이었고 그는 보고서에서 누르하치를 이렇게 묘사했다.
“살이 찌지도 마르지도 않았고, 체격이 건장하고 곧았으며 얼굴이 길고 콧날이 오똑하고 피부는 다소 검은 편이다. 오색의 무늬가 있는 큰 소매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술자리에선 몸소 비파를 퉁기면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고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신충일은 머리를 빡빡 깎고 뒤통수의 머리칼을 길게 땋은 그들의 머리모양에 깜짝 놀랐고, 무엇보다 누르하치의 군사적 준비상황과 왕성한 정복활동, 그리고 인구통합 정책은 심각하게 경계해야할 수준이라고 보고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북방의 정세에 영향을 끼칠 형편은 못되었다.
1616년 음력 설에 누르하치는 금나라 건국을 선포하고 직접 칸의 지위에 오른다. 흔히 후금(後金)이라 부르는 그의 나라는 12세기 그들 조상이 세웠던 금나라를 계승했다. 1619년 여름, 요동지역 총사령관 양호의 8만명과 강홍립의 조선 군대 1만여명을 포함한 명나라의 정예군대와 사르후에서 처음으로 맞서 싸워 대승하였고, 1621년 5월에는 요동지역의 행정수도인 ‘심양’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는다. 백전백승의 누르하치는 드디어 만리장성의 관문인 산해관(山海關)까지 승승장구하였으니, 때는 1626년 2월이었다. 이 관문만 통과하면 명나라의 심장부로 곧바로 진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해관 입구를 방어하는 명나라 장수 원숭환(袁崇煥)은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홍이포(紅夷砲)로 무패의 누르하치의 군대에게 집중포화를 퍼붓는다. 이 영원성(寧遠城)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중상을 입는데 첫패배로 의지와 체력을 모두 소진한 그는 1626년 9월30일에 사망한다.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Hung Taiji)가 칸에 등극한 것은 1627년 정월 초하루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엄청난 재능과 거대한 야망으로 아버지와 형제, 사촌들까지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그 또한 초원지대에서 발흥한 다른 칸들과 마찬가지로 지능과 화술, 민첩성과 체력이 뛰어났고 무엇보다 어떤 위기 상황도 해결하고 돌파하는 권모술수의 천재였다. 그는 곧바로 영원성과 북경성 공격을 감행하지만 번번히 원숭환의 방어막을 뚫지 못한다. 홍타이지는 포로로 잡힌 명나라 환관들에게 원숭환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흘리고 환관들은 탈출에 성공하여 명나라 황제 숭정제에게 첩보한다. 노발대발한 숭정제는 원숭환을 살가죽을 도려내는 형벌로 잔인하게 죽인다. 원숭환이 없는 산해관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었고, 절망한 원숭환의 부하들은 홍이포를 이끌고 홍타이지에게 투항한다.
1636년 본격적인 명나라 정복을 앞두고 홍타이지는 부정적 인상이 강한 ‘여진’이란 족명을 ‘만주족’이라 개칭하고 국명도 청나라로 바꾼다. 그리고 스스로 청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었고, 이를 거부하는 조선을 향해 군마의 머리를 돌린다.
조선은 철이 풍부하여 병사들이 갑옷과 무기를 제대로 갖추었고 대포를 비롯한 각종 무기가 발달한 나라였다. 특히, 조선의 각궁은 북방 야인과 일본의 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성능이어서, 조선은 대대로 성(城)을 지키며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수성전이 강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왜군방어에 효과적이었던 중국의 ‘절강병법(浙江兵法)’을 수용하여 각 부대의 편제를 개혁한다. 전체 부대원의 20%를 조총부대로 구성하여 진(陣)의 최전방에 포진시키고, 적이 100보 이내로 접근했을 때 일제사격을 가하도록 훈련했다. 이때 조총수는 다섯 줄의 열을 짓고 차례로 발사했다. 조선의 조총은 1593년 9월 이순신 장군이 첫 제작에 성공한 이후로 다량 생산되어 1614년에 만주로 출병한 강홍립 장군의 1만여명 군사 중 5천여명이 조총으로 무장했다. 조총수는 방패막 병사들의 호위를 받았고, 그 뒤로 부대장과 등나무 줄기로 만든 가벼운 방패와 환도로 무장한 병사들이 좌우측에 포진되었고 적의 접근을 저지하는 낭선병이 좌우측 전방에 배치되었다. 그 뒤로 장창병과 로켓형 화약 무기인 화전(火箭) 발사병이 뒤따랐다. 최후방엔 솥단지를 둘러맨 취사병이 있었다. 이와같이 새로 개편된 조선군의 최하 단위 부대는 총 12명으로 구성되어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주목할 점은 독화살의 부활이다. 독화살은 고려 시대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조선 개국 이후 성리학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여 중단되었는데, 명나라 군대의 비법을 배워 다시 활용되었다. 고려시대 이후로 편전(片箭)이 천하제일병기라는 말이 있었다. 편전은 일명 ‘애기살’이라고도 하는데 반으로 쪼갠 대나무 대롱에 끼워 발사하는 짧은 화살이다. 일반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는 것이 상대편의 적에게도 보이기 때문에 회피할 수 있지만, 대나무 대롱 속에서 발사되는 편전은 보이지 않게 날아와 적병을 꿰뚫는데 적병은 여전히 상대편의 궁사를 멀뚱히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편전은 457m를 날아갔다.
조선은 건국 이후로 화약 무기를 개발하고 대량 생산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화약 무기가 주력 병기로 자리 잡는데, 특히 해상 전투에서 적극 활용되었다. 유럽인을 지칭하는 Frank의 불랑(佛狼)에서 명칭을 딴 불랑기는 서양에서 전해진 신형 화포로 16세기에 도입되어 종전의 화포에 비해 매우 빠른 속도로 연속사격이 가능한 화기이었고 조선군의 주력 공용 화기로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각종 화기들을 개량하거나 새로 개발하여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국방력을 다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조선은 의병의 나라였다. 환란이 있을 때마다 각지의 의병이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민간에서 성행했던 호전적인 놀이 때문이었다. 척석희(擲石戱)라 불리는 치열하고 살벌한 돌팔매쌈이 그것인데 세종실록 3년조에 태종이 주최한 척석희의 풍경이 기록되어 있다.
‘돌팔매꾼을 좌우로 나누고 좌군은 흰깃발을 우군은 푸른깃발을 세워 표시하며 좌우군의 거리는 200보이다. 좌우의 깃발이 있는 곳까지 서로 추격이 가능하며 깃발을 빼앗는 편이 승리한다…’
이같은 돌팔매쌈은 나무몽둥이까지 휘두르는 매우 위험한 놀이여서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국가 전란 시에 이들 돌팔매꾼들이 종종 정규군으로 기용된 사실이 실록에 전한다.
조선은 전쟁 준비가 허술한 나라도 호전성이 결여된 문약한 나라도 아니었으나,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대는 단 9일 만에 서대문까지 밀고 내려왔다. 인조(仁祖)는 남한산성으로 쫓겨 도망했고 청나라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었고 최명길에 의해 항복 절차만 지리하게 공방했던 것이 병자호란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이후 군대의 말단 조직까지 개편하며 군사력을 양성했던 조선군의 어이없는 참패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보다 조선의 장점인 수성전(守城戰)을 역이용한 홍타이지의 전략이 주효했을 것이나, ‘이괄의 난’ 이후로 또 다른 쿠데타를 두려워한 나머지 군대의 실전 훈련을 불허했던 서인(西人)세력과 인조의 두려움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강홍립과 이괄이 이끌었던 조선의 최정예 부대 수만명이 복구되지 못한 것은 치명적 손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원인의 정점에는 인조와 서인세력이 있다. 인조는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와 초원지대에서 발흥한 칸들처럼 지능과 화술, 민첩성과 체력이 뛰어나지 못했고 위기 상황을 해결하고 돌파하는 삶을 살아본 경험 없이, 단지 반정(反正)에 성공한 서인세력에 선택되어 왕이 된 자일 뿐이었다.
“어디 가까운 곳으로 가을빛 좋은 데 없겠습니까?”
단풍이 물들면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전 국내외 답사를 한답시고 유난을 떨었던 나를 기억하는 이들인데, 미술교사의 안목으로 ‘비장의 모처’가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는 표정이다. 인사치레의 질문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마땅한 답변을 못 해 주춤하며 당황하기 마련이다.
나는 순전히 곱게 물든 가을빛을 탓하며 정차장으로 변한 고속도로를 뚫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초입부터 이미 신선의 영역이었고, 과연 설악산은 설악산인 것이다. 비선대로 이어지는 산수와 비룡폭포 계곡의 장관은 ‘비장의 모처’라는 말이 쓸데없을 지경이었다. 새삼 노인들이 산천초목에 합장하고 기도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권금성을 향하는 케이블카에 올랐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는 곳인데 이날은 다소 한산했다. 케이블카는 안개구름 속을 뚫고 정상에 다다랐다. 울산바위나 속초 앞바다를 시원하게 관망할 수 있었던 시야는 자욱한 안개 속에 갇혀 답답했다. 계단을 더듬어 권금성이 있었다는 바위산에 올랐다. 몽고 침입 시에 권씨와 김씨가 부락민을 이끌고 피난 와서 성을 쌓았다는 곳이다. 성곽의 흔적은 찾아볼 길 없고 여기저기 돌무지만 있었다. 사방으로 추락위험 팻말이 선명했다. 팻말 뒤로는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수 없게 까마득한 절벽이 아찔했다.
‘두 사람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살려고 선택한 피난 길은 왜 더이상 오도가도 못하는 절벽, 세상의 끝이었을까? 그들의 길은 살려고 나선 길이었을까 죽으려고 나선 길이었을까?’
인조가 선택한 남한산성의 막다른 길은 이마를 겨울 땅에 박으면 끝이 나는 길이었으나, 권씨와 김씨가 선택한 권금성의 막다른 길은 저 낭떠러지에 몸을 던져야만 끝이 나는 길이었다. 운무로 가려진 절벽의 아득함은 끝을 알 수 없는 심연과 같아서 영원히 추락할 것만 같았다.
누군가 다시 ‘비장의 모처’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끝에 있는 성(城) 어때요?”
이 가을에 나는 두 개의 성(城)을 보았다. 성은 울긋불긋 가을빛 속에서 고즈넉하거나 숨죽이거나 했는데 그것은 세상의 끝에 가파르게 매달려 있었고…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글·그림 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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