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남’ 정훈 작가님, 뭘 이렇게 많이 ‘남겼남’
2014년 <한겨레21> 기사로 다시 읽는 정훈 작가 인터뷰 한겨레21> 씨네21>
<씨네21> ‘정훈이 만화’ 의 정훈 작가가 2022년 11월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0.
정훈 작가는 1996년부터 2020년까지 25년간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만화를 연재하면서 영화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겨레21>에서도 정훈 작가는 매해 명절을 알리는 퀴즈큰잔치의 첫번째 고개 ‘정훈이 만화’를 한동안 그려, 주인공 ‘남기남’은 우리와 함께 영화도 보고 퀴즈도 푸는 ‘추석의 성룡’ 같은 존재였습니다.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남 창원에서 자란 정훈 작가는 군인을 꿈꾸며 사관학교 입시를 준비하다가 입시에 실패한 뒤 만화가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1995년 만화 잡지 <영챔프>가 주관하는 제2회 신인만화 공모전에서 수상한 뒤 <씨네21>과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때 만난 <씨네21> 오은하 기자의 제안으로 영화 패러디 만화 연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정훈 작가는 1996~1997년 <영챔프>에서 <삼국지>를 패러디한 ‘트러블 삼국지’를 연재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2002년부터 <청년의사>에 의료만화 ‘쇼피알’을 20년간 장기 연재하는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한겨레21>은 2014년 ‘정연순의 말하자면’ 코너에서 정훈 작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정훈 작가를 기리며 당시 인터뷰 기사를 다시 소개합니다.
신지민 기자
남기남을 아시나요? 2014년 4월24일 창간 19주년(제950호)을 맞는 <씨네21>의 ‘영화 대 만화’ 코너에서 19년간 꼬박 주인공을 맡아온 인물입니다. 1995년 태어난 남기남은 독특한 외모에 선량하고 엉뚱한 면을 간직한 소시민입니다. 마치 현실 어딘가에서 만날 듯도 하지만 실제로 찾아보기는 힘든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그 주인공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 긴 세월 독자와 함께 울고 웃게 만든 작가 정훈씨를 만났습니다.
공모전에서 당선작이 아니라 입선이 된 이유
-20년 가까이 되었는데 남기남은 안 늙었어요.
=아니에요. 조금 살이 쪄서 처음에는 직사각형의 틀이었는데 이제는 정사각형의 틀로 바뀌고 있어요. 저와 비슷하게 나이 들어간다고 할까요. 처음에는 10대와 20대의 역할을 잘 맡았는데 지금은 30대 정도고 구레나룻처럼 생긴 털도 났어요.
-이처럼 오래 연재할 줄은 몰랐겠어요.
=대학 입시를 준비하다가 <영챔프> 공모전에서 입상했는데, 그 단편을 보고 <씨네21>에서 연락이 왔어요. 3수에 실패해서 23살, 군 복무를 마쳐서 시간이 있을 때였지요. 뭘 하고 싶냐길래 영화·고전·동화 같은 것을 뒤집어서 세태를 풍자하는 걸 해보고 싶다고 했어요. 오히려 패러디는 한물갔다고 보는 분위기였는데, 잡지사의 생각과 잘 맞아서 본격적으로 만화가의 길을 가게 된 거죠.
-인생을 바꾼 ‘우연’인가요.
=글쎄요. 입상 발표가 좀 늦게 났는데 그걸 기다리며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지방 신문 독자투고란에 시사만평을 그려서 보내고 있었어요. 몇 번 보냈더니 신문사에서 전화가 와서 정기적으로 싣자고 해 생전 처음으로 컷당 고료를 받고 그렸죠. 정말 완전한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생의 방향을 바꾼 큰 전환점이었어요.
-그림은 잘 그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웃음)
=사실 지금도 제가 만화를 못 그린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학교 다닐 때는 미술, 특히 색칠을 못해서 만화가가 된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어요. <영챔프>에서도 당선작이 아니었는데, 담당자 말이 당선시켜주고 싶었지만 그림체가 너무 아니라서 독자들이 항의할까 못했다고.
-그런데 재능은 있었어요.
=스토리를 끌어가는 독특함이랄까, 그런 게 있어요. 사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병맛체’라든가 작가의 개성을 온전히 살리는 그림체를 인정해주기보다는 ‘만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만화체라는 게 있었어요. 거기에 비춰보면 제 그림체는 굉장히 조악하고 조잡하긴 했죠.
-재능을 언제 깨달았나요.
=고등학교 때요. 그 무렵엔 누구나 깨작깨작 만화를 그려보잖아요. 여백은 그냥 놔두지 않을 때죠. 그때 친구들을 주인공 삼아 만화를 그렸는데 학교 전체가 난리가 난 거예요. 서로 돌려보고 나중에 선생님들마저 이거 누가 그렸냐고 하셨죠. 내용도 야한 불량만화였는데 그때 ‘아, 내가 재능이 있구나’ 하고 느꼈죠.
입대 전 6개월이 만화 수업의 전부
-하지만 직업으로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못한 거죠.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나름 잘했거니와 미술을 못해서요. 고등학교에 가서 성적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수학 수업에 들어가니 내가 외워온 공식이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선생님, 제가 외워온 공식을 대입할 문제가 없습니다’ 이랬죠. (웃음) 친구들과 음악 밴드를 하고 놀러다니면서도 막연하게 내가 어릴 땐 신동이었는데 그래도 대학은 서울대 가겠지, 남들은 하향 지원하는데 나만 점수에 맞춰서 소신 지원하고.
-인생의 쓴맛을 보셨겠네요.
=3수까지 그렇게 정신없이 지냈어요. 입시에 떨어져서 군대밖에 갈 데가 없었는데, 아버지가 부르시더니 입대를 6개월 정도 연기하고 뭐 하나 배워보라고 하셨어요. 컴퓨터 같은 것을 배워보라고 내심 권하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저는 정작 만화학원에 갔어요.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서 처음으로 잉크니 스크린톤이니 이런 것을 배웠는데, 입대 영장이 빨리 나와서 그게 만화 수업 받은 것의 전부예요.
-창작 수업도 많이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야기를 짜내나요.
=상상력의 힘이죠. ‘영화 대 만화’를 그릴 때는 영화의 줄거리나 포스터, 제목 등과 연관지어 어떤 이야기를 할까 마감 직전까지 일주일 내내 피 마르게 고민해요. 그러다가 생각이 딱 떠오르면 그다음부터는 남기남이 다 알아서 해요. 결혼 뒤에는 처가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요. 특히 시사적인 내용에서요. 둘이서 영화를 놓고 떠오르는 것을 서로에게 툭툭 던져보면서 반응을 보고 (썰렁하면) 미안, 이러거든요.
-경상도에서 주로 자랐는데 어릴 때 상상력을 키우는 훈련이라도 받았나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창원으로 전근 가셔서 창원 신도시 허허벌판 같은 곳에서 자랐어요. 부모님이 특별히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지는 않으셨어요. 물론 아버지 말씀으로는 너는 커서 검사를 하는 게 좋겠다 하셨지만 사실 아버지가 검사가 뭘 하는 직업인지 제대로 알고 계셨나 의심될 정도였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공상을 참 많이 했어요. 남들이 그걸 다 알게 되면 ‘미친놈 아니야, 왜 그런 걸 상상해’ 할 정도로 제 마음껏 끝까지 상상할 수 있었어요.
-오만 가지를 다 상상해보는 힘이오.
=그 힘이 굉장한 거예요. 일본 만화가들은 그렇게 해도 누가 안 잡아가니까 상상의 끝이 없어요. 섹스와 판타지, 공포를 엮어놓은 작품이나 포르노 같은 걸 보면 놀랄 정도고 ‘아, 이런 것을 생각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하다가도 사실 생각해보면 부럽죠, 만화가 입장에서는. 우리는 머리 속에서만 하는 상상조차도 자기 검열을 해야 하거든요. 특히 이명박 정부 이후 작가로서의 자기 검열이 더 심해졌어요. 김영상 정부 때는 대통령을 가지고 유머집도 만들었는데, 지금은 대통령 패러디 한번 하면 경찰한테서 연락이 올까 하는 것은 둘째 치고 팬들이 먼저 연락해서 걱정해줘요.
-실제 국가정보원을 놓고 패러디 작품을 많이 그렸는데 연락받은 적 없나요.
=그런 적은 없는데 여러 번 하다보니 이분들이 혹시 내 모니터를 보고 있지 않을까 그런 느낌은 가지죠.
대놓고 ‘병맛만화’, 독자들이 슬슬 중독
-실제로 보니까 남기남 캐릭터와는 안 닮았어요.
=제가 아니라 고등학교 친구를 모델로 했거든요. 어느 날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고 왔는데 그 뒷모습의 선이 기가 막혀서 그려놨던 거지요. 그 친구가 지금은 경찰관인데 출근 첫날 담 넘어오는 도둑을 잡았어요. 다만 남기남의 성격은 저와 비슷해요. 이것저것을 한번에 못하고 비교적 단순한 성격이죠.
-저도 팬이지만, 그동안 상당한 팬을 확보했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제 만화가 특이한 점이 있었죠. 지금은 뭐 ‘병맛체’라는 용어가 있지만, 제가 그때 대놓고 ‘병맛’ 만화를 그렸거든요. 보수적 관점에서 보면 이게 무슨 스토리냐고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오죽하면 ‘유치한 스토리에, 황당무계한 결론’이라든가, 조악한 그림체에 지문은 더럽게 많다는 평이 빠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게 문화적 코드가 딱 맞는 사람은 좋아하는, 일종의 B급 정서가 가득했어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슬슬 중독이 된 것 같아요. 지금은 그 팬들도 저와 같이 나이 들어간다고 할까요. 20대는 오히려 저를 잘 몰라요. 제가 웹툰을 하지 않아서요.
-하긴 요즘은 웹툰이 대세죠.
=굉장하죠. 우리나라만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예요. 제가 한번 서울국제만화전 심사를 한 적이 있어요. 모바일·디지털 만화 부문인데 한국과 외국의 격차가 너무 컸어요. 한국 웹툰은 블록버스터급으로 나가는데 아직도 외국에서는 인쇄를 감안해 웹툰을 만드는 쪽이라고 할까요. 정형화된 네칸 만화를 유지한다든지 해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심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될 정도였어요.
-그늘이랄까, 문제도 만만치 않아요.
=문제는 생산성이에요. 웹툰이 유통되는 구조 자체가 잘못된 거죠. 포털 사이트의 힘이 워낙 강하다보니 독자들이 당연히 무료인 줄 알았고 거기에 길들여지게 됐어요. 최근에 유료화 정책을 펼친다고는 해도 그게 작가들에게까지 크게 도움이 되진 않는 정도예요. 엄청난 트래픽을 유발하는 것도 문제예요. 트래픽을 유발할수록 돈을 버는 구조니까 파일이 아무리 커져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하고 있어요. 그런 구조 자체가 고통스럽고 작가들은 저임금에 욕은 욕대로 다 먹고 있어요.
-웹툰도 그렸나요.
=현실정치 이야기를 <삼국지>처럼 풀어가는 내용으로 기획해서 몇 번 연재했는데 그때 태어나서 가장 많은 욕을 먹은 것 같아요.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도 그런 점이 염려돼서 저는 원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고 양비론도 아니어서 안 맞는 것 같아 거절했는데 담당자가 괜찮다고 해서 시도해봤다가…, 결국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이 일어나면서 중단됐어요. 사실 너무나도 중단하고 싶었는데 탄핵이란 절호의 기회가 온 거예요. 그 사건으로 스토리가 다 엉켜버렸거든요.
스마트폰 세대는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창작열이나 재능에 비해 많은 작가들이 적절한 대가 없이 소모된다는 느낌이 있어요.
=미안한 마음뿐이죠. 얼마 전 세 모녀 자살 사건이 있었잖아요. 작은딸도 작가 지망생이었다고 들었어요. 웹툰을 했고 한때 연재도 했는데 1년을 모아도 채 10만원이 안 되는 수입이었다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사실 스마트폰 세대는 좀 나아질 줄 알았어요. 만화도 앱으로 만들어져서 새로운 모델이 될 줄 알았어요. 앱을 통해 독자와 직접 만나서 많이도 아니고 회당 300원, 아니 50원씩만 받아도 생계가 되겠구나 했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이 생태계가 ‘당신이 아니더라도 작가 할 사람은 여의도 한강가에 줄 서 있다’ 이런 태도를 취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선배들이 잘했어야 하는데 아쉬워요.
창작에 적절한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회이면서 한편으로는 숨 막힐 듯한 경쟁에 치여 있는 사회가 그려내는 우울한 자화상이 만화계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만화’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봅니다.
-한국 남성들은 유머감각이 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요.
=많이 부족해요. 인터넷으로 친구들 모임 활동을 해보면 각자 올리는 사진도 비슷하고 술, 주택·교육 문제, 승진, 퇴직 이런 주제만 있어서요. 거기서도 제 별명은 ‘오분대기기쁨조’예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저를 부러워하는 친구도 많고요.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릴 때부터 억압받으며 자랐잖아요. 학교 다니면서 교련 수업을 받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저기 가서 줄 서라면 줄 서고 주로 명령받으며 살아왔어요. 대학에 들어가서 좀 자연스럽게 되나 싶으면 군대, 그리고 사회에 나가면 줄서기. 이게 머리 속에 완전히 학습돼버린 게 아닐까요.
-우리 사회도 유머가 풍부하지 못해요.
=그 점에서 가장 안타까운 게 언론이에요. 언론이 품위 있게 유머러스하게 대처하는 게 중요한데 사정이 되레 옛날보다 못한 듯해요. 정치는 어떤가요. 이명박 정부 이후로는 제가 만화가인데 때론 라이벌이라고 느낄 정도로 이런 황당무계한 정치인이 있나 놀라죠.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다고 예를 들어서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워요.
-아들이 검사가 되었으면 하셨던 부모님과 갈등은 없었나요.
=저는 다행히 바로 지면을 얻었고, 일부러 초기에는 인터뷰도 많이 했어요. 부모님 안심시켜드리려고요. (웃음) 공모전에 입상했을 때요, 아버지에게 ‘저 만화 당선됐어요’ 했더니 ‘그런다고 먹고사냐’ 이러시는 거예요. 속으로 ‘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합격이란 걸 해봤는데 왜 이러시나 마음 아파 죽겠네’ 했죠. 그 다음날인가 동네 식당에 가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당선 소식을 전해드렸더니 어제 네 아버지가 와서 술 드시고 그렇게 자랑을 하더라고 웃으며 말하시는 거예요.
-무뚝뚝하나 정이 깊으신 분이네요.
=그렇죠. 그 뒤 낮에 갑자기 이유 없이 전화해서 ‘아버지, 뭐하세요.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해봤어요. 어색하면서도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지금은 대화도 많이 하고 아버지도 자주 전화하시는데 여전히 정치적 문제가 나오면 이렇게 되죠. ‘난 이명박이 박정희 이후로 가장 훌륭한 대통령인 것 같아.’ ‘아버지, 그만하세요! (웃음)
보수와 진보, 결국 충돌하며 ‘진보’하겠죠
대화를 나누자니 정훈이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몇 안 되는 행운을 누리는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크게 욕심내지 않는 성격과 정 깊은 가족, 열성적인 팬을 가진 그의 삶이 바로 따뜻하고 엉뚱한 매력을 가득 지닌 주인공 남기남을 우리에게 보내준 게 아닌가 합니다.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요.
=남의 생각을 함부로 단죄하지 않는 사회요. 또 하나, 우리 사회가 너무 양극화로 가다 못해 머슴과 마름의 싸움으로 만들고 있어요. 이 부분이 극복돼야 해요.
-그럼에도 사회는 좋아질까요.
=긍정적으로 봐요. 우리 사회가 가지는 역동성이 있어요. 보수적인 생각과 진보적인 생각이 서로 충돌하고 욕하지만 결국 그 힘으로 발전할 거라고 믿어요. 싸워가면서 진보적으로 변해갈 거예요.
대구=정연순 변호사, 녹취 나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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