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기업, 증권상품 깨고 환매 러시…PF·CP 다음은 '랩' 충격?
증권사 유동성 위기가 부동산PF(프로젝트 파이낸싱), CP(기업어음)에 이어 단기금융상품으로까지 번졌다. 연말에 급전이 필요한 기업들이 연이어 증권사 금융상품을 해지하고 돈을 빼가는 '환매 러시' 조짐이 나타난다.
레고랜드 사태, 흥국생명 콜옵션 미이행 등 자금시장의 경색 위기가 연이어 나타나면서 기업도, 증권사도 얼어붙었다.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위기 징후에서 중소 증권사의 유동성 위기가 약한 고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 9월말 레고랜드 ABCP(자산유동화 기업어음) 채무불이행 사태가 터진 이후 증권사 법인 고객들의 금융상품 해지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전반적으로 높아진 가운데 기업의 연말 자금 집행 수요까지 겹치면서 급전이 필요한 기업들이 단기적으로 유동화하기 쉬운 증권사 금융상품부터 해지하고 나선 것이다.
기업은 평소에 여유 자금을 굴리기 위해 다양한 금융상품에 가입한다. 은행의 정기예금에 넣어두기도 하지만 이보다 금리가 좀 더 높은 채권, 펀드, MMF(머니마켓펀드) 등에 투자하기도 한다. 증권사가 제공하는 법인용 상품으로는 랩어카운트(종합자산관리서비스), 금전신탁 등이 있다.
다양한 금융상품으로 여유 자금을 굴리던 기업들의 분위기가 최근 달라졌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 CP, 단기사채 등의 부도 위험이 높아지면서 이같은 자산을 담은 랩 상품에 대한 불안감도 커졌다. 게다가 레고랜드발 부동산PF 시장 위기로 증권사의 유동성 위기가 부각되자 증권사에서 판매한 상품은 더 불안하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중요한 건 연말이 다가올수록 기업의 자금 집행 수요가 커진다는 사실이다. 기일이 돌아오는 어음을 막거나 대출 이자를 내기도 하고 연말 상여금·성과급 등에도 상당한 돈이 들어간다.
문제는 기업의 자금조달 사정도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은행 대출 금리는 계속 오르는 중이고 신용등급이 우수한 회사채도 이자를 연 5~6% 이상 줘야 한다.
더 많은 이자를 주고서라도 돈을 빌릴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최근 회사채 시장은 한국전력이나 금융회사 같은 최고 우량등급이 아니면 돈을 빌리기조차 어렵다. 주식시장은 분위기가 더 험악하다. CB(전환사채) 발행이나 유상증자는 꿈도 못꾼다.
증권사에 맡겨 놓은 금융상품을 해지하는 게 편하다. 수도권에 있는 A증권사 지점장은 "최근 법인 고객들이 단기상품 위주로 환매 요청을 하고 있고 기존에 하려던 투자도 유보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최근 일련의 사태로 '증권사 상품은 불안하다'는 인식이 생기다보니 연 6~7%짜리 상품을 제시해도 예금이나 수시물 같은 안전자산 위주로만 찾는다"고 말했다.
지방에 있는 B증권사 PB(자산관리사)는 "레고랜드 사태 전에 3개월짜리 단기상품에 가입한 법인 고객들은 최근 상품에 문제가 없는지 문의해 온다"며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상품 만기가 돌아오는 연말에 롤오버(재투자)하지 않고 현금 상환을 받는 고객이 많을 것 같다"고 말했다.
환매 요청이 계속되면 증권사 유동성에도 부담이 된다. 환매 요청에 대응하려면 신규 유입된 자금으로 환매하거나 금융상품에 담긴 자산을 매각해 돈을 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현재 법인 신규 자금 유입은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금융상품에 있는 CP나 회사채 등을 팔아야 하는데 녹록찮다. 우량 회사채도 다 소화가 안 되는 상황에서 갖고 있는 자산을 급하게 팔려면 금리를 더 높게(가격을 싸게) 제시해야 한다. CP 91일물 금리는 지난달 초 3.31%에서 지난 4일 4.88%로 한 달 만에 1.57%포인트 급증했다. 역마진을 감수해서라도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한다는 얘기다.
특히 대형사에 비해 자금력이 떨어지는 중소 증권사의 상황은 더 안좋다. 대형사는 발행어음 등으로 자금을 조달할 여력이 있지만 중소 증권사는 그렇지 않다. 원리금보장형 상품인 ELB(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나 DLB(기타파생결합사채)의 금리를 높여 자금을 조달하려고 해도 시장에서 완전히 소화되지 않는다.
C증권사의 WM(자산관리) 부장은 "대형 증권사도 단기자금 유출이 심각한데 중소 증권사의 상황은 더 심각할 것"이라며 "금융지주사가 있거나 모기업 지원이 있는 증권사는 그나마 낫지만 그렇지 않은 증권사는 잘못하면 흔들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2분기말 기준 증권사 건전성 지표인 NCR(순자본비율)가 평균(717%) 이하이면서 투자일임계약 잔고가 1조원 이상인 증권사는 △교보증권 7조2958억원 △유진투자증권 3조7629억원 △하이투자증권 2조5227억원 △유안타증권 2조3399억원 △IBK투자증권 2조2779억원 등이다.
관건은 증권사가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기 전에 자금시장 경색 문제를 얼마나 완화할 수 있느냐다. 금융당국은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를 조성해 50조원 이상 유동성을 공급할 계획이다. 5대 금융지주는 95조원 규모의 시장 유동성과 계열사 자금 지원으로 시장을 안정화한다. 금투업계에서는 대형 증권사 9곳이 4500억원 규모의 '제2의 채안펀드'를 조성해 중소형사의 유동성을 지원하기로 했다.
김지영 교보증권 연구원은 "증권사들이 2000년대 이후 몇 번의 위기를 거치면서 자본확충을 많이 해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낮다"면서도 "하지만 리스크가 어느정도 존재하기 때문에 중소 증권사라 하더라도 대주주나 계열사 지원이 얼만큼 진행되는지 잘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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