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소리꾼들, 창극의 세계를 넓히다···국립창극단 ‘신예 작창가’ 프로젝트
‘창극의 작곡’ 담당하는 작창가 발굴·양성
신예 작창가가 만든 신작 4편, 내달 관객에 첫 시연
“옹~! 가네 집에 일났네, 일났어, 옹~가네 집에 일났네. 속상하다 살다 살다 이런 일은 보도 듣도 못하였네. 옹~가네 집에 일났네. 옹헤야 옹헤야 어쩔씨구 옹헤야.”
리드미컬한 북소리와 함께 ‘옹’ 소리를 다채롭게 변주한 소리꾼들의 타령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진다. 경쾌한 장단과 재치 있는 말맛이 어우러진 이 소리는 신예 작창가 장서윤(31)이 ‘옹고집타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창극 <옹처>의 한 대목. 작자·연대 미상의 판소리계 소설인 옹고집타령은 판소리 열두 마당 중 하나였으나 현재는 그 사설만 전해진다. 장서윤은 극작가 김민정과 함께 원작의 심술궂은 인물 ‘옹고집’이 아닌 그의 아내 ‘옹처’에 주목해 여성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다시 썼다.
옛이야기를 현대적 감각으로 비틀어 주체적인 여성 서사로 재탄생시킨 <옹처>는 국립창극단이 올해 처음 시작한 ‘작창가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된 창극이다. 작창가는 창극의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국립창극단은 올해 초 차세대 작창가를 발굴·양성하기 위해 신예 작창가 4명을 선발해 창작 워크숍부터 멘토링, 시연까지 단계별 작품 제작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창작물 심사와 면접을 거쳐 선발된 신진 작창가는 국악계에서 주목받아온 젊은 소리꾼들. 조지 오웰 소설 <동물농장> 등을 창작 판소리로 선보여 호평을 받은 소리꾼 장서윤을 비롯해 창극단의 간판 배우 유태평양(30), 작곡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보여온 차세대 국악인 서의철(27), 박정수(23) 등이다. 이들은 유실된 판소리 일곱 바탕 등 한국적인 소재를 동시대에 맞는 이야기로 각색해 ‘오늘의 창극’으로 선보인다.
작창의 바탕이 되는 대본도 새로 만들었다. 극작가 4명이 작창가들과 짝을 이뤄 작업했다. 유태평양과 극작가 김풍년은 ‘강릉매화타령’의 뒷이야기를 그린 <강릉서캐타령>을, 박정수와 극작가 김민정은 조선시대 양반가 부녀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동명의 내방가사에서 영감을 얻은 <덴동어미 화전가>를 선보인다.
서의철은 극작가 이철희와 함께 ‘무숙이타령’을 재해석한 2인 창극 <게우사>로 풀어냈다. ‘벗을 타이르는 말’이라는 뜻을 지닌 <게우사>는 원작 속 방탕한 인물 ‘김무숙’과 그의 첩인 기생 ‘의양’의 이야기를 남편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치려는 김무숙의 당찬 아내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노랫말에도 젊은 창작자의 재치가 엿보인다. “나의 신랑 김무숙은 돈을 써도써도써도 돈 걱정, 돈 워리~. 그리하여 돈 귀한 줄 모른다 아이 돈 노~! 노름판에 백냥천냥, 사기꾼에 천냥만냥, 비트코인에 십만냥, 그렇게 뿌린 돈이 억만냥, 조만냥!”
국립창극단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창극의 핵심이자 작품의 성패를 가늠하는 요소라 할 수 있는 ‘작창(作唱)’의 중요성 때문이다. 한국 고유의 음악극이라 할 수 있는 창극은 서양의 오페라, 뮤지컬처럼 극본·연출·음악·춤·무대 등 다양한 영역이 응집된 종합공연예술이다. 이 중 작창은 전통음악의 다양한 장단과 음계를 활용해 극의 흐름에 맞게 새로운 소리를 짜는 작업으로, 판소리가 중심이 되는 창극 전반을 이끌어가는 핵심 요소다.
최근 10년 새 창극은 전통 판소리는 물론 소설과 그리스 비극, 서양 희곡, 경극 등 다양한 소재를 흡수하며 외연을 확장해왔고, 동시대 공연예술 장르로 다시 관객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국립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중 하나인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비롯해 중국 경극을 소재로 한 <패왕별희>,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한 <트로이의 여인들>, 최근 선보인 셰익스피어 비극 <리어>까지 전통 판소리의 틀에만 얽매이지 않은 작업들로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두루 받았다. 이처럼 창극의 외연 확장에 따라 동시대 관객과 호흡할 차세대 작창가의 발굴과 양성이 필요한 실정이지만, 작창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정규 교육 과정은 전무하다. 판소리의 소리 길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물론 민요나 정가 등에 대한 폭넓은 지식도 필요한 전문적 영역인 만큼 현재 활동하는 작창가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다.
국립창극단을 넘어 창극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작창가를 키워내는 프로젝트인 만큼 ‘멘토’들도 화려하게 구성했다. 안숙선 명창을 비롯해 작창가 한승석·이자람, 연출가 고선웅, 극작가 배삼식이 지원에 나섰다. 작창가 이자람은 “저를 비롯해 소수의 작창가들이 창극의 음악을 담당해왔는데 이는 작창가의 부재를 보여주는 일”이라며 “누구보다 작창가 양성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승석은 “젊은 국악인들이 대중음악의 트렌드도 잘 알고 있어서, 대중음악의 정서가 우리 전통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점도 있었다”면서 “더 풍성한 음악의 어법이 생겨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신작 4편은 오는 12월10~11일 이틀간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시연회를 통해 관객에게 첫선을 보인다. 각 작품이 약 30분 분량으로 작품별로 캐스팅된 국립창극단 배우들이 무대에 오른다. 국립창극단은 관객과 전문가 평가를 토대로 완성도 높은 작품은 향후 창극단의 정규 공연으로도 발전시킬 방침이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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