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은 우릴 멸종으로 이끈다”…‘회복력의 시대’로 돌아온 리프킨
‘진보의 시대’에 사망선고, ‘회복력’이 새시대 세계관
“우리를 ‘멸종 사건’(extinction event)으로 몰고 간 진보(progress)의 시대는 저물고 회복력의 시대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회복력의 시대는 인류를 비롯하여 지구의 생명을 재생시킬 수 있는 두번째 기회일 지도 모릅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이자 사회사상가 제러미 리프킨(77)이 새 책 <회복력 시대>(민음사)로 돌아왔다. 빈발하는 자연 재난, 팬데믹을 겪으며 누구나 ‘종말’을 예감하고 사는 시대, 미래학자는 ‘진보의 시대’에 한 번 더 확실한 사망 선고를 내리고 이전 시대를 대체할 인류의 새로운 세계관으로 ‘회복력’을 제시한다.
7일 국내 언론과 진행한 공동 서면 인터뷰에서 리프킨은 전세계 곳곳에서 회복력 시대로 전환의 기미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 전환을 제외하고는 인류의 멸종을 막을 대안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리프킨이 말하는 ‘회복력’의 핵심은 중복과 다양성이다. “생태학을 연구하다 보면, 회복력이란 ‘중복’에서 온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다가옵니다. 번영 정도와 다양성이 높은 생태계일수록 회복력도 강합니다.”
책에서 리프킨은 중복과 다양성이 회복력을 담보한다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 아몬드 재배를 사례로 든다. 캘리포니아 센트럴밸리는 한동안 아몬드 재배의 최적지로 여겨졌고, 전세계 생산량의 80%가 이곳에서 나왔다. 가장 효율적인 경작지가 따로 있는데 분산 재배를 하는 건 중복이자 비효율로 여겨졌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이 지역이 사막화되면서 아몬드 재배는 위기에 직면했다. “어떤 사업에서든 단일재배, 즉 한 바구니에 모든 아몬드를 담는 것이 효율적이기는 해도 미래의 알 수 없는 위협에 대한 회복력이 부족하다.” 문제는 이러한 단일재배가 인간을 대상으로도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리프킨은 인간에게 해로운 형질을 제거하는 유전자 접합기술 ‘크리스퍼’(CRISPR) 등 생명공학 기술도 아몬드 재배가 맞닥뜨렸던 외부 효과로부터 취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처럼 분명한 결함을 갖고 있는데도 그동안 ‘효율성’은 “신성”이자 “복음”처럼 취급됐다. 리프킨은 페스트로 인해 중세 가톨릭 세계관이 붕괴하면서 그 자리를 효율성이 메꾸었다고 본다. 과학이 판을 깔았고, 재주는 경제학이 부렸다. “뉴턴의 세 법칙은 우주의 모든 힘이 상호작용하고 ‘평형’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을 다룬다. (…) 경제학자들은 자율 시장에서도 수요와 공급이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응하고 조정하는 방식으로 움직여 결국 합의와 거래, ‘평형’ 쪽으로 회귀를 이끌어낸다고 주장”했다. 뉴턴에게 우주는 예측·계산할 수 있는 대상이었고, 자발성이나 예측 불가능성의 여지는 없었으며, 이런 관점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대상화, 즉 자원화와 착취로 쉽게 옮겨갔다.
그러나 경제학이 부린 재주는 시간이라는 요소를 감쪽같이 감추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눈속임’이었다. 리프킨은 “기존 경제학의 치명적인 결함은(…) 모든 경제적 교환을 시간을 초월하는 진공 상태에 가둠으로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편리하게 무시했다는 것”이라며 “국내총생산(GDP)은 경제활동의 순간적 가치만을 측정할 뿐, 이에 수반되는 지구의 에너지·천연자원의 고갈, 엔트로피 폐기물 측면에서 비용을 설명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공간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연을 분리된 ‘객체’로 보아왔지만, 과학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구의 종과 생태계가 우리 몸의 가장자리에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 몸 안팎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반투막’이다. (… ) 우리 종이 자연과 어떻게든 분리되어 있다는 개념을 산산이 부숴야 한다.” (책에서)
효율성 세계관을 지탱해 온 왜곡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바로잡는 것은 회복력 시대로의 선결 조건이다. 리프킨에게 회복력은 ‘원상복귀’가 아니다. 그건 이미 불가능하다. 회복력은 자연과 인간의 끊어진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고, 자연-인간 간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거버넌스의 변화도 필연적이다. “회복력 시대의 거버넌스는 천연자원에 대한 주권에서 지역 생태계에 대한 책임으로 전환된다”. 리프킨은 투표에만 반짝 참여하고 외면하는 대의민주주의로는 자연과 다시 관계 맺기 어렵다며 ‘생태지역 거버넌스’와 ‘동료 시민 의회’를 말한다. 국가, 지자체 구획을 넘어 ‘생태지역’을 중심으로 시민이 깊숙이 참여하는 정치 형태다. 미국 5개 주, 캐나다 5개 주가 협력체를 결성해 생태계를 관리하는 ‘캐스캐디아(Cascadia) 생태지역’이 대표적인 예다. “흥미롭게도 (지역) 거버넌스에서 개개인의 참여도가 높아지면 인류는 더더욱 글로벌한 성격을 띠게 됩니다.”
팬데믹을 겪은 한국 청년들에게 한 마디를 부탁하자, 리프킨은 이렇게 말했다. “거리 시위와 기후위기 선언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앙) 정치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 여러분은 이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리프킨은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 애도를 표했다. 그는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도 모두가 놀랐고,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됐다”며 “전세계에서 이런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데, 보다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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