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한류를 이끄는 첨병 '방송영상콘텐츠'
넷플릭스가 3분기 실적을 발표했을 때 모두 깜짝 놀랐다. 회원수 정체, 주가 하락으로 고전이 예상되던 기업이 신규 구독자 241만명을 가입시키며 반등에 성공한 것이다. 신규 회원 가운데 60%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나왔다. 넷플릭스는 7월에 공개한 한국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작품은 4억200만 시청 시간을 기록하며 56개국에서 '톱10'에 올랐다. 지난해 세계를 강타한 '오징어게임'은 제74회 에미상에서 감독상·남우주연상 등 6관왕을 차지했다. 에미상 역사에서 비영어권 작품이 감독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 누구도 한국 드라마·예능 프로그램이 세계 시장을 움직이는 킬러콘텐츠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는 방송영상산업은 한류를 선두에서 이끌고 연관 산업 발전에도 기여한다.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 해외 한류 조사 결과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K-팝, 한식과 함께 드라마가 첫손에 꼽혔다. 코로나19 팬데믹에도 한국은 제작을 멈추지 않았고, 세계 시장에 수준 높은 작품을 꾸준히 공급한 결과다.
한류 콘텐츠는 다른 상품의 수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크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우리 드라마를 시청한 사람은 한국산 식품, 의류, 화장품, 가전제품을 구입할 공산이 높다는 얘기다. 수출입은행 연구에 따르면 K-콘텐츠를 1억달러어치 수출하면 소비재 수출이 두 배 가까이 증가하고 생산유발효과는 다섯 배에 이른다. 잘 만든 드라마 한 편은 대한민국을 매력 국가로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제조업·서비스업 성장에도 도움이 되는 특급 효자 상품이다.
세계가 주목하는 영상 콘텐츠 강국이 되었으나 국내 산업 구조는 여전히 취약하다. 드라마, 예능, 다큐멘터리 등 방송 프로그램은 대부분 중소 제작사가 만든다. 일부 대기업·방송사 계열 기업을 제외하고 90% 이상의 제작사가 직원 수 10명, 연 매출 10억원 이하로 영세한 실정이다.
인구 5000만명의 작은 내수시장 규모로 해외 의존도가 높은 데다 미디어 플랫폼 수에 비해 콘텐츠 제작사가 많아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이런 환경에서 세계가 인정하는 작품이 꾸준히 나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한류 영상콘텐츠의 근원은 프로듀서·작가·감독의 높은 창의성과 열정, 배우의 빼어난 연기, 현장 스태프의 숙련된 전문성에서 나온다. 이에 더해 불완전한 시장을 보완하고 산업을 뒤에서 돕는 정부 정책이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문지원 작가 장편 드라마 데뷔작이다. 문 작가는 영화감독 지망생 시절에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 창의인재 동반사업 교육생으로 선발돼 생계 걱정 없이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의 제작사 대표는 창업 초기에 받은 융자지원 사업의 도움이 컸다고 밝혔다.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2009년부터 방송 포맷 지원사업을 이어온 결과 '너의 목소리가 보여' '로또싱어' '배틀인더박스' 같은 예능 포맷이 세계 65개국에 판매됐다. 올해 4월에는 '복면가왕' 크리에이터 박원우 작가가 아시아 최초로 국제 포맷어워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시설·장비 구축 역시 정부 몫이다. 쾌적하고 안전한 제작 환경을 고려해 만든 첨단 시설 '스튜디오 큐브'에서는 '오징어게임' '미스터 션샤인' '킹덤2' 같은 대형 드라마 촬영이 진행됐다. 신진 창작자 발굴·양성에서 제작비 지원과 투·융자, 인프라 구축, 해외 마케팅까지 시장과 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을 찾아 마중물을 부어온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다.
지난달 말 콘진원 초청으로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방한했다. 펠르랭 전 장관은 강연에서 '오징어게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헤어질 결심' 등 영상 콘텐츠를 사례로 제시하며 한국 콘텐츠의 소프트파워가 세계로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고 했다. 펠르랭 전 장관은 “기업 투자·노력과 더불어 한국 정부의 지속적 지원과 민·관 협력이 인상적”이라고 성공 요인을 짚으며 한류 확산은 민간이 앞장서고 공공이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손발을 잘 맞춰 이뤄낸 결과라고 분석했다.
몇 년 사이 세계 방송영상산업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전통 미디어가 퇴조하고 넷플릭스, 디즈니, 아마존 등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중심으로 산업이 빠르게 재편됐다. 글로벌 미디어 플랫폼이 시장을 잠식하며 한국은 콘텐츠 생산의 하청기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콘텐츠 제작 경쟁력을 기르기 위해 중소 제작사를 육성하는 동시에 국내 플랫폼 기업이 자리 잡고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핵심은 콘텐츠와 글로벌 경쟁력이다. 제2의 '오징어게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만들 수 있도록 제작 지원과 세제 혜택을 확대하고, 인프라를 강화해야 한다. 콘진원도 OTT 특화 콘텐츠를 포함해 방송영상콘텐츠 제작 지원 규모를 확대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큰 방향은 역시 기업이 앞장서고 공공은 지원 역할을 맡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직접 지원은 줄이되 콘텐츠 기획 개발, 제작,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을 선진국 수준으로 늘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돌려받은 비용이 다음 작품 제작과 투자에 투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류는 국가 이미지 개선은 물론 연관 산업 수출에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낳는다. 한류 핵심은 방송영상콘텐츠다. 글로벌 미디어 콘텐츠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세계 시장에서 한국 방송영상산업이 어떻게 경쟁력을 유지할 것인가. 새로운 과제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조현래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장
○조현래 원장은…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제36회 행정고시 합격 후 문화체육관광부의 콘텐츠, 예술, 관광, 소통 등 전 분야에서 정책 경험을 쌓은 문화행정 전문가다. 문체부에서는 콘텐츠정책국장, 관광산업정책관, 국민소통실장, 종무실장 등을 역임했다.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석사 학위와 KDI 국제정책대학원 공공정책학 석사 학위를 받고, 한성대 행정학 박사를 수료했다. 지난해 9월 한국콘텐츠진흥원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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