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이태원의 아이히만

2022. 11. 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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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들이 문제다.

유대인 학살범죄의 실무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무엇인가를 해서 문제가 됐지만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정부 각 부처 및 기관의 책임자 및 실무담당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고 있다.

아이히만이 아돌프 히틀러의 인류적 범죄를 '명령대로 실행해서 문제'였다면,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따를 명령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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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들이 문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문제다. 내려야 할 명령을 하지 않고, 올려야 할 보고를 하지 않은 관료들이 문제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정부의 고위 책임자부터 말단의 실무선까지 아무도 사전 안전관리와 사후 대응 조치에 제대로 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된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학살범죄의 명령을 받아 실행한 나치 독일친위대 장교 겸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였던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의 죄는 ‘상부 명령을 따라 실행한 죄’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극악무도하고 악마적인 심연을 가진 괴물’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의 죄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한나 아렌트는 사실상 아이히만을 체계에 의해 가동되는, 양심과 윤리·도덕적 판단을 중지한 ‘근면한 꼭두각시’로 보면서 ‘무사유’가 악의 평범성이라고 주장했다. 나치는 ‘학살’이나 ‘제거’ ‘살인’이라는 단어 대신 ‘최종해결책’ ‘소개’ ‘의학적 문제’ 등이라는 말을 쓰게 함으로써 관료들이 동정이나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했다. 최근엔 유대인 학살에 대한 아이히만의 적극적인 의지를 한나 아렌트가 과소 평가했거나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권력 체계 속 개인이 보여주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통찰은 결코 빛이 바랠 수 없다.

유대인 학살범죄의 실무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무엇인가를 해서 문제가 됐지만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정부 각 부처 및 기관의 책임자 및 실무담당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고 있다. 아이히만이 아돌프 히틀러의 인류적 범죄를 ‘명령대로 실행해서 문제’였다면,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따를 명령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물론 철저히 규명돼야 할 문제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통해 밝히고 싶었던 것은 히틀러처럼 ‘명령을 한 권력자’뿐 아니라 ‘명령에 복종한 자’의 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태원 참사의 책임규명 과정은 어쩌면 한나 아렌트의 사유와는 역순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들의 죄부터 ‘명령을 내리지 않은 자’의 더 큰 책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무사유’의 죄를 이번엔 명령권자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전범재판 법정에서 확인한 것은 도덕적 판단을 중지한 채 시키는 일을 최대한 근면하게 수행한 체계 속의 한 개인이었다. 반면 이태원 참사를 목도한 우리 국민이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은 아무도 시키지 않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개인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절망에도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 될 참사 이후 그래도 우리는 한 가닥 희망도 발견했다. 자신의 안전마저 위협적인 상황에서 구조의 손길을 내밀었던 수많은 시민, 상인들이다. ‘누구나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그들의 증언은 마지막으로 한나 아렌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아마도 ‘선의 평범성’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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