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발전과 가장 밀접한 매체는 게임이다. 사실적인 그래픽과 정교한 구조는 사람들을 게임에 깊이 몰입시킨다. 이제 게임은 사용자로 하여금 이야기를 직접 만들게끔 유도하고, 사용자는 오직 자신만의 서사를 갖게 된다. 비록 로그아웃하면 그만인 휘발성 강한 서사라 할지라도 사용자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 다른 형태로 표현된다. 시나 소설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설치미술로 눈앞에 등장하기도 한다. 미래에는 게임이 선도적인 매체가 되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금, 게임에서 영감을 받는 작가들을 만났다.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게임과 예술의 기묘한 연관 관계를 추적했다.
➊ <로드 오브 히어로즈>
서사가 짜임새 있는 게임을 좋아한다. 최근에 나온 게임 중에선 <로드 오브 히어로즈> 시나리오가 훌륭하다. 요즘 모바일 게임에서 흔히 유행하는 캐릭터를 뽑는 시스템이지만, ‘덕이 있는 정복 군주’라는 설정을 통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인재를 모은다는 스토리로 연결한다. 주인공의 성별을 택할 수 있고, 이들에게 같은 성격과 대사를 부여해도 위화감이 없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보편적이라고 할 법한 올바른 길을 가고자 애쓴다. 최근엔 이런 캐릭터를 많이 보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주인공의 모습인데도 말이다.
➋ 선택
<저예산 프로젝트>의 이세연은 “윤리적이고 선량한 선택지에 더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배치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그 선택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선량한 선택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믿게 된다”고 말한다. 그의 생각처럼, 내가 플레이한 좋은 게임들은 선량한 선택을 유도했다.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소중히 여기게 된 걸 포기해야만 하는 선택지가 등장할 땐 깊게 고민하게 되지. 그 고민은 책을 읽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고, 그때의 체험은 소설이나 영화의 체험과도 비교할 수 없다. 내 선택으로 한 세계의 운명이 바뀌니까. <랑그릿사2>는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주인공이 전쟁 한복판에서 군대를 이끌고 싸운다. 선택에 따라 잔인한 정복 군주가 될 수도 있고, 제국에 저항하는 반란군이 될 수도 있고, 중도적 입장에서 평화를 추구할 수도 있다. 게임 제작자라면 유저에게 선택지를 주고 고민하게 하는 것이 책무라고 생각한다. 그게 게임만의 특별한 점이다. 소설은 그 선택을 작가가 해야만 하거든.
➌ <팬텀: 팬텀 오브 인페르노>
게임과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우로부치 겐의 데뷔작.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죽일지 말지 결정하는 선택지를 계속 맞닥뜨린다. 어떤 선택도 올바르지 않고,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 한 명을 살리기 위해 다른 한 명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내가 죽는’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이 게임은 사실 기나긴 시나리오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지만, 최근 가장 몰입한 게임이다.
➍ <메탈 기어 솔리드4>
영상과 스토리가 탁월한 게임이다. 게임의 기본 원칙을 종종 무시하곤 해서, 플레이하다 말고 두 시간 동안 동영상을 봐야 하는 구간도 있다. 심지어 중간에 끌 수도 없다. 영상과 스토리에 굉장한 자신감이 있지 않으면 시도할 수 없는 것이다. 전투 방식도 특이하다. 전쟁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적게 죽일수록 점수가 높다! ‘게임이니까 죽인다’고 생각하고 신나게 살인을 하다가, 갑자기 살인의 무게를 깨달아버리게 되지. 내가 지금까지 게임에서 죽인 적들이, 주인공의 환상 속에서 나를 저주하며 유령이 되어 나타나는 장면도 있다.
➎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 소설 <역병의 바다> 주인공은 밤마다 청량리역으로 돌아가 “아니야, 다음 기차로 가자”라고 말하는 상상을 한다. 많은 이들이 인생을 돌이켜보며 그때 내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하는 반추 속에 살아간다. 게임은 이 순간을 세이브하고 로드하고, 회귀시켜 다른 선택지를 보게 한다. 그러나 소설가로서 나는 그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가장 극적이며 재미있는 선택지를 고르지. 이것이 게임 시나리오를 쓸 때와 소설을 쓸 때의 차이다.
➏ 웹소설
최근 한국 웹소설은 대체로 게임에 기반하고 있다. 웹소설 스토리텔링의 주된 테마는 회귀, 여러 회차로 재경험하는 인생, 빙의, 레벨업 등이다. 많은 웹소설에서 주인공의 능력치를 수치로 보여주고, ‘스탯’ 창이 나타나며, 상황을 설명해주면서 ‘퀘스트 수락’을 할지 물어보는 존재가 등장한다. 전형적 게임 스토리텔링이지. 게임 플레이란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캐릭터에게 빙의해 캐릭터를 조정하는 것이다. 게임 안에서 미션에 실패하면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며,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를 다시 진행해 더 나은 엔딩으로 가려고 한다. 나는 동시대 청년이 가장 극적으로 체험한 세계가 다름 아닌 게임의 세계고, 그것을 소설로 구현하고 있으며, 이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임은 현대 한국 소설의 한 축에 극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➐ <7인의 집행관>
➑ SF 소설과 게임
이 소설은 처음엔 게임 시나리오로 상상한 이야기였다. 주인공이 7개의 세계를 무작위로 플레이한 뒤 각 세계에서 단서를 모으면 세계의 비밀이 풀리는 스토리다. 소설은 게임과 달리 순서가 있어야 하니, 상상한 이야기를 그대로 사용하지는 못했다. 이 이야기를 게임으로 구현한다면 소설보다 자연스러울 거라고 생각한다. ‘집행관’이 세계를 만들고 규칙을 지배한다는 설정은 게임 운영자를 생각하면 간단할 것이다. 다른 세계에 들어갈 때마다 주인공이 기억을 잃는 설정 또한 게임이라면 독자가 여러 세계 중 무엇을 먼저 플레이할지 모르기 때문에 만든 것이기도 하다. 게임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유저’를 위한 서사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기억상실 설정이 흔하다.
SF 소설을 게임으로 만든 경우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최초의 리얼타임 시뮬레이션 게임도 프랭크 허버트의 SF 소설 <듄>을 기반으로 했다. 최근엔 실사 영화와 드라마도 그래픽을 활용하면서 기존에 게임에서만 볼 수 있던 SF와 판타지가 영화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SF 소설과 판타지의 위상도 높아지고 대중화되고 있고. 둘은 분명 연결되어 있다. SF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내 입장은 명확하다. 소설은 게임보다도, 애니메이션보다도 자유로운 장르다. 기술력이나 자본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까. 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현실에 갇힐 이유가 굳이 있겠는가.
➒ 텍스트 어드벤처
➓ 비선형적 시간 구조
텍스트로도 게임을 할 수 있다. ‘텍스트 어드벤처’ 장르의 문학이자 게임이 있다. 하이퍼링크 하나만으로도, 전자책으로 쉽게 구현할 수 있지. 영미 문화권에선 방대한 텍스트 어드벤처 책들이 있다. <끝없는 게임(Choose your own Adventure)> 시리즈는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변하는 소설로 다양한 모험이 담겨 있으며, 선택지에 따라 다른 엔딩으로 가게 된다. 한국에서 성인용 텍스트 어드벤처 책이 출간된다면 참여해보고 싶다.
많은 롤플레잉 게임은 비선형적 구조를 지닌다. 1→2→3→4→5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1, 2, 3, 4의 시나리오를 다 보았다면 5를 볼 수 있는 식. <파이널 판타지 3>는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며 단서를 찾는다. 어드벤처 게임 <쉐도우 오브 메모리즈>에선 주인공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시간 여행을 하며 여러 시나리오를 체험하는데, 모든 시나리오를 다 겪은 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깨닫는다. 놀랐던 건, 시나리오를 다 겪은 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깨달은’ 시나리오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는 미래를 선택하는데, 그 미래는 바로 ‘나 혼자만 불행해지는’ 시나리오다.
⓫ 동시간대의 두 서사
⓬ 미래의 게임, 그리고 소설
내 소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와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같은 시간대에 유사한 공간을 헤매지만, 서로 만나지 못하는 두 남녀의 서사다. 이런 서사는 게임에서 흔한 편이다. <바이오하자드 2>는 좀비가 창궐한 도시에 레온과 클레어라는 두 캐릭터가 각기 다른 곳에서 출발해 같은 곳을 헤매는 구조로 이뤄진다. 둘의 서사는 독립적이며, 둘은 서로의 흔적만 볼 뿐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두 캐릭터를 전부 플레이해야 이야기 구조가 완전해진다.
인천 판타지 컨벤션에서 증강현실 게임을 해본 적이 있는데 놀라웠다. 현실의 방에서 다양한 괴물들이 뛰어다니더라. 그 체험과 VR 게임 개발자들의 강연이 나의 소설 <저예산 프로젝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 이전에는 가상현실-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게임-만을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구현하기 쉬운 것이 증강현실-우리의 현실에 홀로그램 같은 기술을 이용한 게임-이고, 아주 근미래에 증강현실이 유행하는 세계가 오리라는 생각이 들어, 소설의 방향을 바꾸었다. 사실 현실과 가상은 인간이 신화와 설화로 이야기를 만들고 구전하던 태초부터 이미 서로 섞여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텍스트가, 소설이 만들어내는 가상 체험 또한 화려한 기술과 그래픽으로 구현한 가상 체험에 모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상상은 언제나 기술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김보영 SF 작가
한국 SF 문학의 큰 산 같은 작가. 게임 기획자 출신으로 게임 시나리오를 쓰다 SF 작가로 데뷔했고, <7인의 집행관>으로 제1회 SF어워드 장편 대상을 수상했다. 세계 최대 출판사 미국 하퍼콜린스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비롯한 세 권의 출간을 앞두고 있고, 게임 소설 앤솔러지 <엔딩 보게 해주세요>에 <저예산 프로젝트>로 참여했다. 경이로운 상상력을 펼치는 그에겐 게임에 대한 애착만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