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 자제령'에도 쏟아지는 '특수채'…산업은행 '딜레마'
기사내용 요약
'자제령' 이후 은행채 발행 대폭 감소…특수채는 '요지부동'
"시장안정 구원투수 역할해야 하는데…산금채 발행 불가피"
[서울=뉴시스] 정옥주 기자 = 금융당국이 자금 시장 안정을 위해 은행권과 공공기관들에 채권 발행을 자제할 것을 주문하자, 은행채 발행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다만 채권 발행 외 자금 조달을 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국책은행들은 정부의 거듭된 '자제' 요청에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정부의 '50조+α' 유동성 지원 조치를 통해 대규모 정책자금을 공급해야 하는 산업은행 입장에서는 주력 자금 조달처인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줄여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산금채 위주의 조달구조로 인해 시중은행, 지방은행과 달리 예수부채 비중이 21.3%로 낮은 반면, 선순위 사채를 통한 자금 조달 비중이 47.1%로 높은 편이다.
7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최근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은행 등 시중은행들에 은행채 발행을 최소화 할 것을 주문한데 이어, 한국전력공사와 한국가스공사 등 공공기관들과 산업은행 등 금융공기업에도 회사채 발행을 최대한 자제해 줄 것을 주문했다. 자금 조달을 위해 채권 발행이 불가피하다면, 국내 보다는 해외에서 발행해줄 것을 요구했다.
최근 신용도와 금리가 높은 한국전력 등 공기업 채권과 은행채들이 시장에 쏟아지자 구축효과가 나타나면서, 정작 자금 조달이 필요한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는 ‘돈맥경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도 대출 적격담보증권 대상에 은행채와 한전채 등을 추가하며 당국과 보조를 맞췄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회사채 발행액은 3조6921억원, 상환액은 8조5300억원으로 집계돼 상환액이 발행액의 2배 이상을 넘어섰다. 이에 발행액에서 상환액을 뺀 '순발행액'은 –4조8379억원으로 협회가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06년 이후 가장 많은 상환이 이뤄졌다. 순상환이 5조원 가까이 되는 건 이례적으로, 그만큼 회사채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의 '자제령' 이후 지난 9월 사상 최고치를 찍었던 은행채 발행 규모는 급감하고 있다. 지난달 은행채는 발행액 20조5300억원, 상환액 20조2700억원으로 순발행액이 2600억원으로 집계돼 전달 순발행액(7조4600억원)에 대비해 급감했다.
실제 은행채는 정부가 '자제령'을 내린 지난달 26일을 기점으로 발행량이 큰 폭으로 줄었다. 지난달 17~21일까지만 해도 순발행액이 1조3600억원에 달했던 은행채는 지난달 24~31일에는 순발행액이 –6600억원으로 급감했다. 자제령 외에도 정부가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비율 정상화 조치를 연기하면서, LCR 비율을 서둘러 맞출 필요가 없어진 은행들이 채권 발행을 줄일 수 있었다는 평가다.
반면 특수채의 발행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특수채는 산업은행의 산업금융채권(산금채), 기업은행의 중소기업금융채권(중금채), 수출입은행이 발행하는 수출입채권, 한전채 등이 포함되는데, 발행 규모가 여전히 6조원의 넘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달 특수채 발행액은 6조2080억원, 상환액 4조1381억원으로 순발행액은 2조699억원이었다. 이는 8월(7조1457억원)과 9월(6조5006억원)에 비해 발행 규모가 소폭 줄어들긴 했지만 이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국책은행들은 시중은행과는 다르게 예금 비중이 적고, 자금 조달에서 채권 의존도가 큰 만큼 채권 발행량을 갑자기 줄이기는 힘든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 채권 발행 없인 자금 조달을 할 수 있는 방도가 사실상 없고,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면 유동성이 필요한 기업들에 제 때 자금을 공급할 수 없게 돼 악순환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책은행들은 신규 발행 보다는 기존 채권을 차환(롤오버)해 발행 규모를 유지하는 형식으로 정부의 정책을 따르고 있다.
더군다나 산은의 경우 당국이 자금시장 안정을 위해 추진 중인 '50조+α' 유동성 지원 조치에 따라 10조원 규모의 회사채·CP 매입 프로그램을 가동, 우선 2조원을 증권사 CP 매입에 투입한 상태다. 또 3조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의 추가 캐피탈 콜도 마무리해야 하는 등 기업들의 '자금줄' 역할을 담당한터라, 순조로운 지원을 위해선 유동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산은 관계자는 "시중은행과 달리 개인 예금 비중이 현저히 낮고 채권 외 다른 자금 조달 방법이 마땅히 없다"며 "기존에 발행했던 채권들의 만기가 돌아오고 있는데 정상적으로 정책자금을 공급하기 위해선 적어도 기존에 정해진 스케줄대로 유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현재 시장의 안정이 중요한 상황인 만큼 더 이상 추가로 늘어나지 않도록 신규 발행은 최대한 늦출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시장에서는 정부가 채안펀드 등으로 급한 불을 끄고는 있지만, '자금 블랙홀'로 대표되는 특수채와 한전채의 발행이 의미있는 수준으로 줄어들지 않으면 레고랜드 사태로 촉발된 자금 시장 경색이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에 대해 금융당국 관계자는 "국책은행들의 경우 스케줄상 아예 발행을 하지 않을 순 없는 상황이나 발행을 가급적 최소화하려고 하고 있다"며 "특히 산은의 역할이 확대되다보니 산금채 발행이 많아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는데, 시장의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공기관들과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channa224@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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