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조 잭팟’ 폴란드 원전, 장밋빛 전망 속 약간은 불안한 이유
곳곳에 ‘복병’
[비즈니스 포커스]
한국이 폴란드의 민간 발전사와 원전 건설 사업 협력을 추진하기로 하면서 13년 만의 ‘한국형 원전’의 수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최종 계약이 성사되면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와 수출 계약을 한 이후 13년 만이다.
하지만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폴란드 측과 서명한 사업의향서(LOI)가 통상적으로 법적 구속력이 없고 폴란드 현지 정치 상황에 따른 변동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최종 계약이 성사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수원은 10월 31일 서울플라자호텔에서 폴란드 최대 민간 발전사인 제팍(ZEPAK), 폴란드전력공사(PGE)와 폴란드 퐁트누프 지역에 원전을 짓는 LOI에 서명했다. 이날 산업통상자원부와 폴란드 국유재산부도 폴란드 퐁트누프 지역의 원전 개발 계획 수립과 관련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한수원·제팍·PGE 등 3개사가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240km 떨어진 퐁트누프 지역에 한국의 신형 원전인 APR(Advanced Power Reactor) 1400 기술을 기반으로 한 2~4기 규모의 원전을 짓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퐁트누프 원전은 제팍이 2024년 말 운영을 중단하는 폴란드 퐁트누프 석탄 화력 발전소를 철거하고 해당 부지에 지어질 계획이다. 폴란드의 ‘에너지 정책 2040(PEP 2040)’에 포함된 폴란드 정부의 기존 원전 계획을 보완하기 위해 민간 기업 주도로 새롭게 추진되는 사업이다.
UAE 바라카 이후 13년 만에 수주 문턱
이번 폴란드 퐁트누프 원전 사업 규모는 최소 10조원대에서 최대 40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관측된다. 한국형 원전 4기를 수출한 UAE 바라카 원전(20조원)과는 시간 차가 있어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원전 4기 건설을 추진 중인 이집트 엘다바 원전이 300억 달러(약 42조6000억원)였던 것을 고려하면 퐁트누프 원전 사업이 엘다바 원전 사업과 비슷한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통상적으로 본계약 체결 후 2~3년 뒤 착공이 진행되는 만큼 이번 폴란드 퐁트누프 원전 사업의 착공 시점은 2025~2026년으로 예상된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최종 계약이 성사되면 일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원전업계에 일감을 제공함으로써 한국 원전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집트 원전(건설 부문) 진출에 이어 조만간 공개 입찰을 앞두고 있는 체코 두코바니 원전 수주전에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것으로 보인다. 체코 원전은 미국·프랑스와 함께 3파전이 예상된다.
이번 건은 폴란드 정부가 추진하는 루비아토보·코팔리노 원전 사업과 다른 민간 중심 사업이다. 앞서 한수원은 루비아토보·코팔리노 일대에 6~9GW 규모의 원전 6기를 건설하는 사업에 참여하기로 하고 지난 4월 사업 제안서를 제출했지만 폴란드 정부가 추진한 원전 건설 사업자에는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우선 협상 대상자에 선정됐다.
한국과 폴란드는 최근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천무 다연장 로켓(MLRS), 레드백 장갑차 등 대규모 수출 계약을 하며 방산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번 폴란드 퐁트누프 원전 사업을 계기로 방산에 이어 원전 등 에너지 분야에서 폭넓은 협력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기대감이 나오고 있다.
LOI 구속력 없어…현지 정치 상황도 변수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지난 10월 21일(현지 시간) 한수원과 한전을 상대로 미국 수출입통제법에 따라 한국형 원전 APR 1400의 수출을 제한해 달라는 취지의 소송을 미국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에 제기하면서 한국형 원전 수출에 차질이 빚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웨스팅하우스는 APR 1400에 자사 기술이 적용됐다며 이를 다른 나라에 수출하려면 웨스팅하우스와 미국 에너지부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2007년 6월 만료된 해당 기술의 사용 협정문에는 로열티 지급 없이 국내외에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실시권’이 명문화돼 있는 것으로 확인돼 업계에선 웨스팅하우스의 승소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한수원과 폴란드 제팍이 LOI를 체결한 현시점에서 사업 추진 규모가 아직 미정이고 세부 검토에만 1년 정도 소요돼 실제 본계약은 2024년 하반기로 예상되는 만큼 벌써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이르다는 지적이다.
야체크 사신 폴란드 부총리 겸 국유재산부 장관은 MOU와 LOI 체결식 직후 기자 간담회에서 퐁트누프 원전 프로젝트의 본계약 체결 가능성에 대해 “100%”라면서도 “기간은 기업 경영진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LOI는 정식 계약을 하기 전 당사자들간의 예비적 합의의 일종이다. 이번 LOI와 MOU 체결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것은 맞지만 원전 수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수원은 폴란드 정부가 아닌 폴란드 민간 사업자인 제팍과 LOI를 체결한 것으로, LOI는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언제든 일방의 변심에 의해 파기될 수 있다.
2023년 11월 실시되는 폴란드 총선 결과도 돌발 변수 우려를 키운다. 현재 폴란드의 집권 여당은 보수당이다. 야당이 최근 폴란드 정부의 한국산 무기 도입에 반발하며 한국과 체결한 계약서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총선에서 집권 세력이 패배한다면 한국과의 무기 구매 계약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각에선 이번 LOI 체결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폴란드 정치권이 치적을 쌓기 위해 남발하는 공수표가 될 공산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1년여간 폴란드에서 소형 모듈 원자로(SMR) 관련 LOI 체결은 5건이다. 제팍은 한수원과 LOI를 체결한 날 퐁트누프 부지에 SMR을 건설하기 위해 폴란드 화학 업체 SGE와 체결했던 기존의 LOI를 해지했다.
본계약이 현실화되더라도 또 다른 난관에 빠질 수 있다. 제팍이 한수원과 LOI를 체결하기 전 다수의 업체와 맺은 LOI는 모두 SMR에 관한 것으로, SMR은 바닷가에 지어야 하는 대형 원전과 달리 대량의 냉각수가 필요 없어 강이나 호숫가에 지을 수 있고 사막 한가운데에도 건설할 수 있다. 내륙의 호숫가에 자리한 퐁트누프 부지가 대형 원전이 들어서기에 적합하지 않아 냉각수 확보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국의 원전 기술은 계획된 공기와 예산을 준수하면서도 건설 단가는 세계 최저 수준이어서 가격 경쟁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APR 1400은 원전 종주국인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 인증과 유럽 사업자 요건(EUR) 등 세계 양대 인증을 모두 취득해 안전성을 입증했다.
다만 저가 수주 전략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도 고개를 든다.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한국의 원전 건설 단가는 2021년 기준 1킬로와트(kW)당 3571달러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원전 굴기’를 앞세운 중국도 1kW당 4174달러로, 한국이 약 17% 저렴하다. 미국(5833달러), 프랑스(7931달러)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고 사우디아라비아 원전 수주를 두고 경합 중인 러시아(6250달러)와 비교해도 한국의 원전 건설 단가가 43% 정도 싸다.
폴란드의 싱크탱크인 폴리티카 인사이트 등에 따르면 한수원이 탈락하고 웨스팅하우스가 선정된 루비아토보·코팔리노 원전 사업에서 한수원이 제시한 건설 단가는 1메가와트(MW)당 267만 달러로 프랑스 EDF(약 460만 달러)와 웨스팅하우스(400만 달러)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알려졌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2009년 UAE 원전 수출 당시 건설 단가(MW당 332만 달러)와 비교해도 20%나 낮고 현재 가치(452만 달러) 대비 41% 낮은 엄청난 출혈 입찰”이라며 “공기업인 한수원을 지원하는 한국수출입은행 등 공공 기관들의 금융 지원 비용 부담을 늘리고 향후 한수원과 한국전력공사에 막대한 손실을 유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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