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94] 바지락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022. 11. 7. 02:25
야밤에 눈을 떴다.
엊저녁에 산 바지락들이
부엌 구석에서
입을 벌리고 살아 있었다.
“날이 새면
모조리
먹어치울 거야.”
마귀할멈처럼
나는 웃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입을 약간 벌리고
자는 것밖에 내 밤은 없었다.
-이시가키 린(1920~2004) (유정 옮김)
깜찍한 발상이로군. 감탄하며 하하 웃은 뒤에 쓴맛이 감돈다. 시에 스며있는 페이소스에 공감하며 나는 시인이 여성임을, 혼자 사는 여성임을 알아차렸다. 야밤에 깨어나 눈을 뜨고 본 것이 하필 ‘바지락’이었다니. 침대와 부엌이 한 공간에 있어, 방금 깨어나 침침한 눈에 생명체의 살아있는 입이 포착되어 민감하게 반응한 게 아닌가.
자다 깨어 바지락을 보고 ‘저것들이 상하지 않을까? 냉장고에 넣어야지’ 따위의 걱정이 아니라 “날이 새면 모조리 먹어치울 거야”라니. 수동적인 여성성을 배반하며 왕성한 식욕을 보여준 그녀. 린의 작품을 가리켜 오노 도자부로는 “가정 노동이 이제까지 의미한 봉건적, 퇴영적인 것을 일절 포함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의 산업은행에서 일하며 시를 써 ‘은행원 시인’이라 불리는 그녀가 펴낸 첫 시집의 제목은 ‘내 앞에 있는 냄비와 가마솥과 타오르는 불 그리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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