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농업 선구자들 뭉쳤다...‘토리버스’ 타고 메타버스 시동
2001년 설립한 벤처농업대학의 대변신
‘메타 아그로 스쿨’로 전환한 데 이어
명인들과 함께 디지털농업자산포럼 결성
‘토리버스’라는 메타버스 세상 구축 추진
샤넬이 메타버스 매장에서 매출 늘리듯
소농들, 토리버스에서 농산물 판매 기회
2001년 설립한 벤처농업대학의 대변신
‘메타 아그로 스쿨’로 전환한 데 이어
명인들과 함께 디지털농업자산포럼 결성
‘토리버스’라는 메타버스 세상 구축 추진
샤넬이 메타버스 매장에서 매출 늘리듯
소농들, 토리버스에서 농산물 판매 기회
충남 금산군 서대산 자락에 위치한 한국벤처농업대학. 주말을 이용해 매월 한 차례씩 운영되는 1년 과정의 비정규 대학이지만 한국 농업계에 끼친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 2001년 4월 첫 입학생을 받아 매년 100~150명씩 배출한 졸업생이 지금까지 3200명에 달한다. 이 곳을 거쳐간 전국 각지 농민들은 지역으로 돌아가 ‘선도 농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정하는 식품명인이자 대한민국 대표 농부로 꼽히는 광양 청매실농원의 홍쌍리 여사가 이 대학 1기 졸업생이다. 이후에도 이 대학에서 배출한 ‘명인’이 30여 명에 달한다. 정부가 공식 인정한 명인(농식품부 식품명인+농촌진흥청 농업기술명인)이 총 150명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숫자다. 전국 지자체와 민간단체에서 지정한 명인까지 합치면 벤처농업대 출신 명인은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다.
벤처농업대학의 설립자는 민승규 국립한경대 석좌교수. 일본 도쿄대에서 농업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일하던 1997년 회사에서 쓰고 남은 중고 PC 15대를 한 마을에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농촌 정보화 교육에 나섰다. 3년간 이어진 봉사활동 과정에서 교육에 대한 농민들의 열망을 확인한 그는 벤처농업대학 설립으로 화답했다. 벤처농업대는 처음 세웠던 원칙 그대로 정부 지원 없이 오로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낸 수업료로 지금껏 운영되고 있다. 졸업을 하려면 출석 일수를 채워야 하고, 자체 사업계획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도 그대로다.
그런데 벤처농업대학이 설립 21년 만에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벤처’라는 단어가 생소하던 시절 벤처와 농업의 접목을 시도했던 이 대학에서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메타버스(metaverse)’다.
민 교수를 포함한 벤처농업대학 운영진들과 이 대학을 졸업한 농식품 분야 명인들, 그리고 농업에 애정을 가진 ICT 인재들이 힘을 합쳐 ‘토리버스(Toriverse)’라는 이름의 농업 메타버스 행성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농업과 메타버스의 결합은 아직까지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시도에 속한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 벤처농업대에서 메타아그로스쿨로
벤처농업대학의 변신은 지난 4월 시작됐다. 22기 입학생을 받으면서 학교 이름을 ‘메타 아그로 스쿨(Meta Agro School)’로 바꾼 것. 설립자인 민 교수가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는 왜 그런 결정을 한 것일까. 설명을 듣고보니 머리가 끄덕여졌다.
“벤처농업대학 설립 당시 농업계에서는 사실 격려보다 비판이 더 많았습니다. 농업은 잘 생산해서 판매하면 되는 것인데, 무슨 벤처 개념을 가져다 붙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농업에도 경영 마인드와 마케팅이 필요하고, 농민들도 기업가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봤습니다. 대학은 딱 20년만 운영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까지 벤처농업이 자리를 잡지 못하면 그건 제가 틀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도 농업에서 수많은 벤처 성공 사례가 나왔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벤처농업이라는 말이 진부해졌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농업이 세상 변화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가능한 빨리 메타버스를 잡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런 생각에 기름을 부은 것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2년 이상 지속되면서 20기와 21기 입학생들은 대면수업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어쩔 수 없이 비대면 수업이 자주 진행되면서 과거 커리큘럼으로는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기 어려웠다. 앞으로는 비대면의 일상화를 염두에 둔 커리큘럼 개발이 필요했고, 그러자면 메타버스를 비롯한 ICT 기술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봤다. 메타아그로스쿨은 그렇게 탄생했다.
민 교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해 농업에도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같은 신기술이 빠르게 적용되면서 수확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던 농업에 수확 체증의 법칙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등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농업에서 이런 획기적인 변화를 견인하는 것이 메타버스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메타버스가 마치 만화나 게임 정도로 보이지만 미래에는 가상의 공간을 넘어 또 다른 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우리 농업은 늘 다른 산업을 뒤쫓아 가기 바빴다면 메타버스 세상에서는 농업이 오히려 다른 산업보다 앞서 달렸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농업 관련된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어
가상매장서 재배, 생산, 유통 전부 가능
◆ 명인들과 디지털농업자산포럼 결성
농업 메타버스 세상으로 가는 초석을 다지기 위해 민 교수는 우선 벤처농업대학 출신 명인들과 손을 잡았다. 이들 명인은 대부분 농업계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생각을 가진 선도농가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이 먼저 농업 메타버스를 주도해 나간다면 다른 농민들에게 상당한 파급 효과를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민 교수를 포함한 벤처농업대학 운영진은 이를 위해 지난 7월 명인들과 함께 디지털농업자산포럼을 결성해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이 포럼은 명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다양한 농업 관련 지식과 노하우를 포함해 농업·농촌 자원을 디지털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인적·기술적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메타버스를 구축하기 위한 전초 작업인 셈이다.
이 포럼엔 농업 분야 최고 전문기관인 농촌진흥청과 산하 국립농업과학원이 참여하고 있고, 메타버스 분야 전문가들도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섰다. 김상남 국립농업과학원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해 대한민국이 보유하고 있는 유·무형의 농업 관련 자산을 디지털화하는 것은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국내 최고의 메타버스 전문가로 포럼에 합류한 이승환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박사는 농업에서 메타버스가 차지할 미래의 위상을 옛 영상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1995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토크쇼였던 ‘데이비드 레터먼 쇼’에 출연했던 장면이다.
먼저 레터먼이 게이츠에게 물었다.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인터넷이라는 것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게이츠가 씩 웃으면서 답한다. “물론이죠.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고, 이메일도 보낼 수 있어요. 한마디로 엄청난 놈이죠.”
그러자 레터먼이 비웃는다. “인터넷으로 야구 중계도 가능하다고 자랑하던데요. 그까짓 거 라디오로도 가능한데요 뭘.”(청중들 웃음)
불과 몇 년 뒤부터 인터넷을 빼고는 일상 생활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레터먼이 그렇게 게이츠의 말을 웃음거리로 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박사는 “당시 인터넷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메타버스가 일상 생활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며 “농업과 메타버스의 결합이 미래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농업 메타버스 ‘토리버스’ 구축
벤처농업대학과 디지털농업자산포럼, 그리고 명인들의 목표는 아직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농업 메타버스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메타버스에는 토리버스(Toriverse)라는 이름도 붙였다. 비옥한 땅을 의미하는 조어인 토리(土里)와 메타버스의 합성어다. 이 메타버스 행성에서는 농업과 관련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구현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우선 농업행성 안에서는 작물을 재배하고 생산해 유통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상의 공간이지만 실제 농장과 연계 운영함으로써 작물을 실제로 재배하고, 사고파는 것이 가능하다. 최근 들어 각광받고 있는 스마트팜을 메타버스에 구축하는 것도 가능하다. 농산물이 필요한 소비자는 보다 안전한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고, 농사 경험이 적은 귀농인들은 메타버스에서 가상으로 농사를 지어봄으로써 보다 쉽게 농촌에 정착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 이를 응용하면 농업 교육 측면에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성제훈 농촌진흥청 디지털농업추진단장은 “농업 교육은 시간과 장소 제약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지만 메타버스를 활용해 증강현실(AR)이나 가상현실(VR) 교육을 실시하면 시·공간 제약 없이 교육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공영도매시장을 대체할 수 있는 농산물 거래소를 메타버스에 구축하는 것도 가능하다. 기존의 온라인 거래에 비해 훨씬 더 현실 세계와 가깝게 구현할 수 있어 오프라인 거래소를 적극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이 밖에도 농업 메타버스를 통해 구축할 수 있는 서비스는 △지역·테마별 축제 △농업 관련 게임 △농축수산물 광고·홍보 △농업자산을 활용한 대체불가토큰(NFT) 출시 △농업 NFT 전시·경매 등 다양하다.
이런 메타버스 서비스의 최종 목표는 한국 농업의 경쟁력 제고다. 권영미 메타아그로스쿨 교수는 “사람들은 늘 한국 농업은 위기라는 말을 달고 살지만 진짜 위기는 농업을 위기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농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라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농업을 위기라고 말하기에 앞서 우리 소농(小農)들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을 제시해줘야 한다”며 “현실 농업과 연계가 가능한 농업 메타버스를 제대로 구축한다면 우리 농업에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샤넬과 같은 명품 브랜드들이 메타버스 매장을 통해 매출을 늘리고 있듯이 우리 소농들도 메타버스를 활용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 교수는 여기에 더해 “소비 패턴의 변화를 보면 과거 10인1색에서 10인10색, 지금은 다시 1인10색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이처럼 개인 맞춤형 소비가 일상화되는 트렌드 속에서는 메타버스가 소농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전거래 위해 ‘맘토큰’도 발행
e커머스 기부 등 다양한 활동
“세계가 한국 농업 주목할 것”
◆ 맘테크, 완전 몰입형 메타버스 구축
그러나 농업 메타버스를 아이디어만으로 구축할 수는 없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기술과 자금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벤처농업대와 디지털농업자산포럼은 메타버스 분야 전문가들과 힘을 합쳐 맘테크(MAMTECH)라는 법인을 출범시켰다.
맘테크가 추구하는 메타버스 기술은 현재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게임기반 기술과 달리 보다 현실 세계와 가까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데이비드 조 맘테크 최고기술책임자(CTO)는 “농업 메타버스인 토리버스는 리얼 라이프(real life) 메타버스 세계를 추구한다”며 “가상의 세계이지만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고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햅틱과 모션트랙킹, 풀보디 트래킹 등 기술을 활용해 풀 다이브(full dive, 완전몰입형) 메타버스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라며 “현실 세계에서 사용자의 움직임 그대로 메타버스 안에서 자신을 닮은 아바타가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 이사는 “여기에 더해 페이셜 트래킹 기술을 활용해 현실 세계에서 사용자의 얼굴 표정과 입술 움직임을 메타버스상의 아바타가 그대로 구현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맘테크는 또한 토리버스를 중심으로 하는 메타버스 생태계 구축을 위해 맘토큰(MAM Token) 발행도 추진하고 있다. 토리버스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거래는 맘토큰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맘토큰의 활용도를 높이기위한 방안으로 다른 분야 온·오프라인 기업들과 제휴해 맘토큰 보유자들이 다양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이준연 맘테크 대표는 “앞으로 구축될 농업 메타버스 행성 ‘토리버스’에서는 농업에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 제공을 시작으로 NFT와 이커머스, 결제, 기부, 마일리지 통합 등 다양한 서비스를 단계적으로 도입할 것”이라며 “세계가 한국 농업을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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