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갑 대신 장미를, 창 대신 빵을’···반복되는 비극 속 ‘옳은 선택’은 무엇인가

이영경 기자 2022. 11. 6.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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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하는 폴란드 그림책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인터뷰
폴란드 그림책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신작 <우화>의 한 장면. 비룡소 제공
증오·폭력·적대감 속에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책 만든 계기 돼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우린 서로 도울 수 있는 존재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백인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진 책 표지를 넘기면 사람을 빽빽이 실은 난민선이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다. 또 한 장을 넘긴다. 이번엔 같은 포즈의 흑인 남자다. 한쪽 남자는 두 손목에 수갑을 차고 있다. 옆엔 같은 남자가 등 뒤로 장미꽃 다발을 숨기고 있다. 동일한 동작을 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피부색과 들고 있는 물건에 따라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한쪽이 수감자나 난민을 연상케 한다면, 다른 한쪽은 기쁨과 설렘이 가득한 일상의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우리 몸은 두 다리와 두 팔, 몸뚱이를 갖고 있어요. 몸으로 행할 수 있는 포즈는 한정적인데, 같은 포즈로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죠. 내가 언제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했던 행동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 말고 다른 이들의 어떤 행동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상상하며 만들었습니다.”

2020년 <할머니의 자장가>로 볼로냐 라가치상 뉴호라이즌 부문에 선정되는 등 총 3번의 라가치상을 수상하고 안데르센상 최종 후보로 추천되는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폴란드의 그림책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가 글 없이 그림으로만 이뤄진 그림책 <우화>(비룡소)를 펴냈다.

두 팔을 벌리고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그림. 같은 동작이지만 한 남자는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지기 직전이고, 다른 남자는 마이크 앞에서 심취한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농구를 하는 흑인 남성은 배에서 추락해 바닷에 빠진 난민으로 변한다. 전쟁과 폭력이 벌어지고 있는 한편 누군가는 평화로운 일상과 예술을 즐기는 현실 세계의 모습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우화> 출간을 기념해 지난달 25일 흐미엘레프스카를 영상으로 인터뷰했다.

그림책 <우화>를 펴낸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비룡소 제공

“증오와 인종주의, 폭력과 탐욕, 적대감 속에서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 옛날부터 믿어온 가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이 책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제목 ‘우화’처럼, 책은 특정한 현실을 그리거나 설명하진 않는다. 같은 동작으로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인물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같은 손으로 우산을 들 수도, 총을 들 수도 있다. 나눠먹을 빵을 화덕에서 꺼낼 수도, 창을 들고 누군가를 찌를 수도 있다. 두 손과 두 다리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어떤 행동을 기꺼이 택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그림이 가지고 있는 마술적 힘”이다.

오늘쪽 그림이 아이를 등에 엎고 노는 장면과 같다면, 같은 동작을 하는 왼쪽 그림은 철조망을 통과해 도망치는 난민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비룡소 제공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접경지대 폴란드
구 소련 지배당한 폴란드도 공포 느껴
난민들에게 자발적인 구호와 도움 넘쳐
러시아 문학, 음악 등 거부···문화계도 ‘러시아 보이콧’

폴란드는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의 침략으로 우크라이나 피란민 수백만명이 몰려들었다. 남편을 전쟁터에 남겨두고 아이를 데리고 온 여성들이 거리에 넘친다. 자연스럽게 현실을 떠올리게 되지만 <우화>는 전쟁이 발발하기 한참 전에 만들어졌다. 흐미엘레프스카는 “책의 모든 장면들은 어쩌면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던 사건들, 시간을 넘어서 계속 존재하고 있던 것들을 말하고 있다”고 밝혔다.

폴란드는 아픈 현대사를 갖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침공을 당해 수도 바르샤바가 폭격당했고, 전쟁 후엔 구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책의 메시지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폴란드인은 지배당한 민족으로서의 공포와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요. 그것이 서사에 녹아나는 건 피할 수 없죠. 제 할아버지는 수용소에서 돌아가셨어요.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가 반복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무섭게 느껴집니다.”

흐미엘레프스카는 “길에서 난민 여성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러시아에 지배당한 경험이 있는 폴란드인들은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이 폴란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고 말했다.

흐미엘레프스카는 어린 시절 러시아의 문학, 음악, 그림들을 보고 자랐다. 대부분 동유럽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는 “폴란드에 광범위한 ‘러시아 보이콧’이 이뤄지고 있다. 어떤 문학 모임에서도 러시아 문학을 읽지 않고, 오케스트라는 차이콥스키를 연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화> 속 인물들은 나중에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돼 서로를 돕는다. 흐미엘레프스카는 “자신도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라며 “인물들이 살아서 스스로 돕고자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비룡소 제공

다시 <우화>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같은 동작으로 상반된 행동을 하던 이들이 나중에는 서로 연결되며 서로를 돕는다. 공중에서 추락하던 아이를 흑인 남성이 나타나 받아낸다. 철조망 아래를 기어가는 아이와 엄마를 다른 남자가 돕는다.

“독자들에게 내가 느낀 것 같은 무력감과 절망을 남겨두고 책을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인물들을 종이인형처럼 오려서 맞춰보다가 그들이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자신의 삶을 갖고 서로를 돕고 싶어하는 의지가 있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스스로 도울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어요.”

흐미엘레프스카의 원화는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폴란드 일러스트레이션의 거장들’이란 전시에서 직접 볼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월15일까지 열린다.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에서 열리는 ‘폴란드 일러스트레이션의 거장들’ 전시에 흐미엘레프스카의 <할머니를 위한 자장가>(비룡소)에 들어간 그림도 전시된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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