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진의 햇빛] 안개 속에 스며든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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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이 깊어가며 여기저기 안개가 피어오른다.
안개가 햇빛을 받으면, 겹겹이 쌓인 구름 방울을 지나는 동안 광선의 삼원색이 고르게 시야로 들어오며 희게 보인다.
방금 내린 비로 먼지마저 씻겨내려 더욱 깨끗해진 대기 사이로, 산에 허리를 두른 안개가 햇살을 받아 백옥처럼 하얗게 빛난다.
아직 채 걷히지 않은 두터운 안개층을 지나오며 살아남은 붉은 빛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자, 강물 위에는 정중동의 파문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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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진의 햇빛]
이우진 |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가을밤이 깊어가며 여기저기 안개가 피어오른다. 구름 없이 맑은 밤에는 땅에서 새어 나온 적외선 에너지가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지면 위의 대기도 빠르게 식어간다. 습한 공기가 찬 것을 만나야 수증기가 응결하여 구름 방울이 되는 만큼, 안개 속으로 들어가면 음습하다. 구름 방울로 첩첩이 쌓인 침침한 수분의 장막을 헤쳐가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고 고립된 느낌에 기분이 가라앉는다. 하지만 어디선가 빛이 비치면 사정이 달라진다. 가로등이나 주변 건물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구름 방울에 산란하여 광원 주변으로 은은하게 퍼진다. 구름 방울이 저마다 작은 광원이 되어 텅 빈 공간을 빛의 선으로 연결하면, 나와 주변 세계의 관계망이 복원된 느낌이 든다.
안개가 햇빛을 받으면, 겹겹이 쌓인 구름 방울을 지나는 동안 광선의 삼원색이 고르게 시야로 들어오며 희게 보인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비가 온 후 인왕산 자락을 감싸 안은 안개를 담았다. 늦은 봄, 온대 저기압이 지나가며 뿌린 비가 증발하여 대기중 습도가 한껏 높아진 가운데, 남풍을 따라 한강 지류를 거쳐온 온습한 대기의 물길이 인왕산 기슭을 타고 오르는 곳마다 안개가 군데군데 끼었을 것이다. 방금 내린 비로 먼지마저 씻겨내려 더욱 깨끗해진 대기 사이로, 산에 허리를 두른 안개가 햇살을 받아 백옥처럼 하얗게 빛난다. 바람은 산비탈을 따라 힘차게 솟구치고, 빗물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증기의 다발과 바람이 끌어온 땅의 기운이 만나는 곳에서는, 마치 용이 꿈틀대며 승천하기라도 하는 인상을 준다.
산업화 초기에 인상파 화가들은 안개 특유의 부연 질감과 안개를 통해 퍼져 나온 빛의 색감에 주목했다. 모네는 다양한 각도로 비치는 햇살에 따라 변하는 의사당과 템스강의 안개 낀 풍경을 연작으로 그려냈다. 엷은 안개가 낄 때는 전경이 흐리게 드러날 뿐 아니라, 주변 물체에서 반사된 빛이 안개에 산란하여 시선으로 함께 들어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색채와 질감을 준다. 이동성 고기압이 찾아온 어느 가을 아침, 화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강가에 캔버스를 펼쳤을 것이다. 밤새 템스강 하구에서 유입한 수증기에 공장 연기가 포개지며 내려앉은 안개 위로 햇살이 비친다. 바닥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며 대기가 기지개를 켜자, 안개도 사방으로 흩어진다. 아직 채 걷히지 않은 두터운 안개층을 지나오며 살아남은 붉은 빛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자, 강물 위에는 정중동의 파문이 인다.
이보다 몇 세기 전에 다빈치는 이탈리아 북부 계곡을 따라 흘러든 안개를 여인의 미소 위에 얹었다. 모나리자를 그려낼 무렵에도 종종 대륙 고기압이 유럽을 감싸며 기류가 정체하여 꿀꿀한 날씨가 이어졌을 것이다. 대기는 안정한 가운데, 먼지들이 수증기에 달라붙은 채 차곡차곡 내려앉아 시야는 흐리고, 대기중에서 산란한 햇빛이 전경에 끼어들어 산야에는 어스름한 푸른 빛이 감돌았을 것이다. 거장은 인물 뒤쪽의 계곡과 폭포와 들판을 연무가 낀 듯 희미하게 처리하였다. 배경이 더욱 멀리 있는 것처럼 그려내, 중앙의 인물은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하였다. 게다가 표정을 좌우하는 눈꼬리와 입가의 색감과 질감을 은은하면서도 어둡게 처리해 독자의 예감을 흐려놓았다.
안개 속에서는 세상이 부옇게 보인다. 흑백의 경계가 모호하다. 곧장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도 예측이 안 돼 망설인다. 미래학자 폴 사포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껴안으라고 조언한다. 시장이 누구에게나 예측한 대로 굴러간다면, 그 시장은 투자할 매력이 없다는 거다. 불확실성은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라는 걸 상기하면서도, 나에게만큼은 안개가 걷히기를 바라는 건 풀리지 않는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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