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기 3일 남은 CP가 7.55% 거래···기업들 몰리는데 수요는 씨말라→ 금리 급등 악순환
CP·전자단기사채 수요 받쳐주던
'큰손' 은행신탁도 대거 자금유출
A1급 거래 금리는 이미 5% 넘어
유동성 공급 효과 1~4개월 후행
당분간 금리 상승세 지속 가능성
기업어음(CP) 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하며 연 5% 선을 눈앞에 두고 있다. 채권시장 안정화 조치가 시행된 지 2주가량이 흘렀지만 단기자금 시장에서는 이렇다 할 효과가 확인되지 않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CP 시장에서 민간 수요가 얼어붙은 게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자금 조달이 급한 기업들이 계속해서 고금리로 CP를 발행하고 신탁과 펀드에서 급매 처분이 나오고 있지만 매수자가 턱없이 부족해 금리가 오르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원래라면 CP, 전자 단기사채 등에 대한 수요를 받아줬을 머니마켓펀드(MMF)의 최근 자금 유출에 이어 은행 신탁으로부터도 대규모 자금이 빠져나가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민간이 받쳐주지 않는 상태에서는 정책 효과가 더디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한동안 CP 시장에서 금리 상승세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6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A1급 CP 91일물 금리는 4일 전일 대비 7bp(1bp=0.01%포인트) 오른 연 4.88%에 거래를 마쳤다. 이는 2009년 1월 15일(연 5%) 이후 약 13년 10개월 만의 최고치다. CP 금리는 최근 1주 사이에만 29bp 추가 상승했다. 9월 말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상승한 CP 금리는 채권시장 안정화 조치 시행 이후 일부 소강 상태에 접어든 국고채·통안채와는 달리 오히려 상승 폭을 키우며 연일 연중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금융 당국이 채권시장 안정화 조치를 내놓은 후 2주간 CP 금리 상승폭은 51bp 수준에 이른다.
CP 발행·유통시장에서는 이미 이를 훨씬 웃도는 수준에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주 SK네트웍스(A1)는 CP 44일물 1000억 원 규모를 연 5.5% 금리로 발행했다. 유통시장에서는 호텔롯데(A1) 3개월 만기 CP가 5.02% 금리에 거래됐다.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의 경우 조달 금리 변동 폭이 더 크다. 이달 4일 만기가 3일 남은 A1급 ABCP ‘엔티지씨제8차’가 7.55% 금리에 거래됐다. 엔티지씨제8차는 KB국민카드가 SK에너지로부터 지급받는 카드이용 대금(원금+수수료)에 대한 신탁 수익권을 기반으로 발행되는 ABCP다. 2일에는 내년 1월 만기인 ‘이터널오빈제1차(A1)’ ABCP가 9.1%에 거래됐고 지난달 말에는 DB금융투자가 보증한 만기가 이틀 남은 ‘스펠바인드제17차’ ABCP가 20%의 금리에 거래된 일도 있었다. 이밖에 최근 시장에 나온 ABCP 다수 역시 10%선 후반대의 금리에서 수요를 찾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서는 CP 시장이 쉽사리 진정세를 타지 못하는 원인으로 ‘수요 공백’을 꼽았다. 레고랜드 사태로 지방자치단체가 보증한 ABCP도 디폴트(채무 불이행)가 발생할 수 있다는 공포가 급격히 확산되면서 CP 시장 전반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투자 자금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CP·전단채 등 단기자금 시장의 큰손인 MMF에서는 관련 사태에 대한 공포가 극대화됐던 9월 말부터 약 한 달간 16조 원 가까운 자금이 이탈한 바 있다. 평소 MMF의 자금 유출입이 활발한 점을 감안해도 환매 규모가 컸다. 이후 당국에서 채안펀드 등 대책을 내놓으면서 MMF 자금 유입세가 일부 회복되고 있지만 단기자금 상품을 대량 보유하고 있던 은행 신탁 계좌에서도 관련 자금 유출이 이어지며 시장이 경색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운용사 채권운용 관계자는 “기존에 자산가들이 은행 신탁을 통해 ABCP나 전단채를 억 단위로 많이 사들였는데 여기서도 자금이 빠져나가고 차환이 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단기자금 시장에서는 CP·전단채 등을 발행하려는 수요가 점점 더 몰리면서 금리가 계속 상승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의견도 나온다. 금리 인상기 장기금리물 거래가 잘 이뤄지지 않는 환경에서 자금 확보가 급한 기업들의 급매가 단기자금 시장에 집중되면서 시세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는 평가다. 김상만 하나증권 채권파트장은 “지금 장기금리 거래가 안 돼 기업들도 단기로밖에 자금을 조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급매로 비싸게 나온 매물들이 단기시장 시가 평가에 반영되면서 금리가 크게 뛰고 있다”고 말했다.
민간투자 상황이 얼어붙은 상황에서는 정부가 내놓은 채안펀드 유동성 공급 효과 역시 늦어질 가능성이 크다. 금융 당국은 지난달 24일부터 시장 매입을 시작해 기존 여유 재원인 1조 6000억 원으로 신규 발행되는 CP와 회사채를 사들이고 있다. AA급 이상 회사채와 A1급 이상 CP를 우선적으로 매입했고 이달 들어서는 증권사 CP 역시 일부 사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대책 효과는 후행하기 때문에 CP 시장 효과는 조금 더 기다려봐야 알 수 있다”며 “펀드를 통해 매입을 지속하며 시장 상황을 꾸준히 지켜보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CP 금리가 곧 5% 선도 넘어설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CP 금리는 2009년 1월 15일을 마지막으로 13년간 한 번도 5% 선을 기록한 적이 없다. 이화진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앞선 사례들을 봤을 때도 정책 효과가 나타나려면 짧게는 1~2개월에서 길게는 3~4개월이 걸리기도 했다”며 “현재 한미 기준금리가 계속 오르는 상황을 고려하면 한동안 금리가 상승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지만 시차를 겪은 후 일단 효과가 나기 시작하면 진정세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혜진 기자 sunset@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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