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책과 지성] 회의주의자가 그리운 시대
확증편향 반대한 회의주의의 시조 그리스 철학자
확증편향 반대한 회의주의의 시조 그리스 철학자
◆ 허연의 책과 지성 ◆
우선 모든 존재는 동일한 원인에 대해 각기 다른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욕망하는 바가 다르며
지금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판단은 달라진다.
또 교육, 믿음, 관습에 따라 다른 생각을 가진다.
세상 모든 것은 여러 가지가 혼합돼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규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피론 Pyrrhon (기원전 360년께~기원전 270년께)
◆ 허연의 책과 지성 ◆
확증편향이 넘쳐나는 시대다.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린다. 사실 결론을 확고하게 내려버리면 그 결론이 틀리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싹트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맞는 결론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마구 가져다 쓰기 시작한다. 한 사람의 지성이 자기 합리화 도구가 되는 순간이다. 급기야는 결론을 남에게 강요하기 시작한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으니 조급하다. 자기도 모르게 왜곡을 시작하고 억측이 난무한다.
지금 한국 사회가 앓고 있는 중병이다. 지령을 내리는 칩을 머리에 장착한 듯 확증편향 싸움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진다.
이럴 바에는 회의(懷疑)주의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회의주의를 판단으로부터 도망쳐 버리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회의주의의 본질은 그런 게 아니다.
회의주의(scepticism)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 ‘skeptikos’에서 기원했다. 즉,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의심하고 따져보는 것이 회의주의의 본질이다.
회의주의에는 ‘인간은 오류를 범하는 존재’라는 전제가 깔린다. 맞는 전제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라는 밑그림 위에 세워진 정치이론이나 이념들은 사실 거짓말이다. 인간은 생존 프로그램을 작동하는 감정의 동물이다. 따라서 늘 옳거나 정의롭지는 않다. 한계도 분명하다.
회의주의를 논할 때 떠오르는 인물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론(Pyrrhon)이다. 타고 가던 배가 폭풍우를 만났을 때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돼지가 평화롭게 밥을 먹는 것을 보고 “진정한 현자는 이 돼지처럼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 바로 그 피론이다.
피론은 젊은 시절 우연히 따라나선 동방 원정에서 인도의 현자들을 만나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인간의 무모한 분별이 평정심을 해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판단중지(epoche)’를 외친다. 어떤 것도 절대적 진리일 수는 없다는 외침이었다.
판단중지를 외치면서 피론은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알기 쉽게 정리하면 이런 것들이다. 우선 모든 존재는 동일한 원인에 대해 각기 다른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욕망하는 바가 다르며 지금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판단은 달라진다. 또 교육 방식, 믿음, 관습에 따라 다른 생각을 가진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은 여러 가지가 혼합돼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규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양과 거리에 따라서도 나타나는 것이 다르다. 익숙함이나 비교 우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피론의 혜안이 빛난다. 그렇다. 단세포식 섣부른 판단은 오류투성이다. 물론 인간은 오류를 통해 발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류가 지적인 도약의 발판이 되려면 최소한 악마적인 확증편향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친 소크라테스도, 방법적 회의를 주장한 데카르트도 회의주의자였다.
<문화선임기자>
※ 문화선임기자이자 문학박사 시인인 허연기자가 매주 인기컬럼 <허연의 책과 지성> <시가 있는 월요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허연기자의 감동적이면서 유익한 글을 쉽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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