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전쟁 같은 일상, 어디라도 이태원이다 / 안영춘

안영춘 2022. 11. 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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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이태원 참사]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참사 추모 공간에 추모 쪽지들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안영춘 |논설위원

지난달 30일 아침, 버스를 갈아타려고 서울 연세대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여느 일요일 출근길이면 차 한대 볼 수 없던 연세로를 버스들이 태연히 오가고 있었다. 서대문구가 얼마 전에 ‘주말 차 없는 거리’를 폐지했고, 평일엔 버스만 지나갈 수 있는 ‘대중교통전용지구’마저 해제하려고 한다는 기사를 읽기는 했었다. 한적함이 좋아 500m를 부러 걸어서 지나곤 하던 거리가 차량과 경적 소리만 빼곡했던 오래전으로 되돌아가 있는 풍경이 떠올랐다. 간밤 이태원 참사에 개기일식처럼 검게 먹어버린 심장 한가운데로 저릿한 파동이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태원 참사와 그보다 한없이 사소해 보이는 기초지방자치단체의 퇴행 사이에도 별자리처럼 이어지는 지점이 있다. 무엇보다, 그날 이태원로의 차량 통행을 막았더라면 골목길 인파가 이태원로로 수월하게 빠져 참사를 막거나 적어도 희생자 수를 줄일 수 있었을 거라는 점에서 연세로의 ‘차 없는 거리’와 연결된다. 물리적 맥락 못지않게 중시해야 할 것이 정치적 맥락이다. 2011년 서울광장을 에워쌌던 이명박 정부의 차벽은 사람과 차가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일 수 있음을 인상 깊게 보여줬다. 우리 사회가 사람에 의한 차도의 평화로운 점유를 처음 체험하며 월드컵 응원전을 펼친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람과 차의 역학관계를 좌우하는 건 다름 아닌 권력의 의지였다.

연세로 차 없는 거리 사례는 오늘 권력의 의지가 질주하는 방향을 암시하는 작은 징후다. 속도(이윤)의 가치가 언제나 안전(생명)의 가치를 앞질러 왔지만, 지금은 최고 권력자가 전위에서 브레이크를 뗀 채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경남 창원의 원전 업체를 찾아가 팔짱을 낀 채 “지금 원전업계는 ‘탈원전’이라는 폭탄이 터져 폐허가 된 전쟁터다. 전시엔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 나라 고위관료들이 이미 윤 대통령의 의지를 전방위로 초과 달성했음을 적나라하게 입증한 것이 이태원 참사다.

윤 대통령이 하필 사고가 났다 하면 피해 규모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원전 안전 문제에 ‘전쟁’의 메타포를 들이댄 것도 고약하지만, 그 메타포가 일회성의 우연이 아니라면 더욱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지난달 21일 경찰의 날을 맞아 “마약과의 전쟁에서 승리해달라”고 주문했다. 핼러윈 데이의 이태원은 그 지시를 수행하고자 한 ‘전쟁터’였다.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애초 용산경찰서가 계획한 16명에 서울청 마약범죄수사대와 인접 경찰서 3개 팀을 더해 총 50명의 형사를 투입했다. 공권력은 부재하지 않았다. 다만 안전 대신 전투에 최적화됐을 뿐.

프로이센 시대 독일의 군인이자 전쟁 이론가였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나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했다.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라고도 했다. 그의 개념은 전쟁을 전투행위로만 국한하지 않는 맥락적 시선을 제공한다. 전쟁은 비전투 상태로 확장되고, 일상으로 연장된다. 윤 대통령과 그의 관료 수하들은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을 초과 달성했다. 전시 상태인 이 정부의 개념어 사전에 ‘참사’가 ‘사고’로, ‘희생자’가 ‘사망자’로 등재돼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쟁의 메타포는 발화자의 의도를 넘어서 우리 일상이 안전과도, 평화와도 정반대의 상태임을 상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태원 참사를 거치며 다시 목격한 체제의 부작위에 의한 죽음이야말로 지금이 전쟁 상태임을 암시하는 메타포다. ‘문득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기형도 ‘안개’)하듯, 이참에 향긋한 빵 속에 고단한 야간작업을 하다 안전설비도 없는 기계에 끼여 숨진 노동자의 피가 섞여 있고, 반지하 셋방 일가족의 익사에 권력과 자본이 은폐하는 기후위기의 계급성과 공멸의 위험이 있음을 우리는 각성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전쟁의 메타포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 제목(2015)처럼, 전쟁은 약자의 방식이 아니다. 약자의 메타포는 ‘저항’이고, 저항적 삶으로의 전환은 이태원처럼 일상과 가까운 데서 시작해야 한다. 연세로 ‘차 없는 거리’는 어떤가.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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