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과학 출몰하는 세상, 대통령은 무슨 책 읽을까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은 미신과 의사(擬似)과학에 관한 한 제가 아는 최고의 해독제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나 캐머런 총리가 미신이나 의사과학을 믿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그런 유권자들에 대해서 보다 덜 비굴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에요.” ―패멀라 폴, <작가의 책>, ‘대통령에게 단 한 권의 책을 권할 수 있다면’ 질문에 대한 리처드 도킨스의 대답
“반복, 실패, 축적, 합의, 과학과 민주주의의 힘”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과 늘 옳다는 사람이 토론하면 어떻게 될까. 앞의 사람이 상대방을 배려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짧은 사이에 승패가 기울게 될 것이다. 토론뿐이 아니다. 선한 동기는 답답하고, 미래를 구축하는 것은 한가하고, 당장 눈앞에 원하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실패이다. 그런 상황이 만연해 있다. 우기고 조롱하며 배제하는 사람들만 남은 느낌이다. 지금도 한쪽에서는 무속의 주문으로 원수의 인형에다 바늘을 꽂고, 다른 한쪽에서는 마치 부흥회처럼 기적을 약속한다. 나라 살림과 관련한 일이라면 참으로 심각하다.
지난 미국 대선 직전, <네이처>의 사설이 눈에 띈다. <네이처>는 사실과 진실에 대한 무시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났다고 강조하며 “바이든의 진실, 증거, 과학과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그를 미국 대선의 유일한 선택으로 만든다”고 적었다. 조 바이든은 기대에 부응했다. 그는 대통령 당선 뒤 아폴로 17호가 가져온 월석을 집무실로 옮기고, 실재 과학과 진실을 국정의 중심에 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바이든이 목표로 한 것은 진실을 가려내며 올바른 의사결정을 지원할 과학의 힘이었을 것이다. 칼 세이건은 말한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창의적이고 훈련된 사고방식이다. (…) 과학은 비록 그 사실이 우리의 선입견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사실의 영역으로 초대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먼저 대안적 가설들을 머릿속에 그리고 어느 것이 가장 사실과 잘 부합하는지 알아볼 것을 권한다. 과학은 아무리 이단적이라도 새로운 아이디어라면 무제한적으로 개방적일 것과 모든 것을 가장 엄격한 태도로 회의적으로 검토할 것, 다시 말해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성의 지혜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을 유지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이런 종류의 사고는 변화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본질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칼 세이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과학과 희망’
과학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험을 반복한다. 오류를 당연시하고, 오류를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결코 결과로 한순간 옮겨갈 수 없다. 천천히 축적하고, 원인과 과정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통시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간혹 과학이 낳은 놀라운 기술을 접하며 그 지점에서 신비주의의 유혹에 빠지지만, 그것은 과학의 고통스러운 과정과 지루함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과학은 가설을 세우고 언제나 반박을 허용한다. 흥분, 혼란, 의심, 갈등, 인내, 환호 속에서 항상 과학적 발견을 검증하고 합의해야 한다. 바이든은 당장의 코로나19 극복뿐 아니라, 과학적 사유로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주장했던 건국 정신으로 돌아가 미국의 위상을 회복하려 했을 것이다.
독서대 특허출원한 노무현 대통령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과학적인 발견과 태도에 익숙했다. 피뢰침을 발명한 벤저민 프랭클린은 전기물리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창시자로 존경받는다.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와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역시 변호사임과 동시에 과학자였다. 애덤스는 “모든 인류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화학자이다”라 했고, 제퍼슨은 “인류의 대다수가 등에 안장을 지고 태어나지 않았고, 혜택받은 소수가 장화를 신고 박차를 달고 태어나지 않았음을 증명한 것은 바로 ‘과학의 빛’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독립선언문에 “우리 모두는 동일한 기회, 동일하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쓴 것은 과학적 방법과 민주적 절차의 유사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 시절 경제회복만 생각하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의해 1999년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을 출범시켰다. 나로호와 우주를 향한 우리의 도전은 그로부터 시작됐다. 과학기술처를 과학기술부로 승격시켰고, 김 대통령이 직접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과학도 민주주의도 인내를 통해 통시적으로 통찰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도, 발전할 수도 없다. 민주주의로 훈련된 지도자가 과학을 국가 미래의 전면에 세운 일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토머스 제퍼슨과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를 뛰어넘은 닮은꼴이다. 무엇보다 회전식 독서대를 발명한 제퍼슨처럼 독서대를 만들어 특허출원한 노무현의 삶이 흥미롭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핵심 전략을 과학기술로 규정하고, 이명박 정부에서 교육부와 통합됐던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했다.
노 대통령이 추천 도서로 올린 <수소 혁명>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는 미래를 위한 고민이 읽힌다. 제러미 리프킨이 <수소 혁명>을 출간한 2002년, 수소는 주목받지 못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수소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청와대에 같이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에게 영감을 줬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또 우리가 과학을 즐기기를 바랐던 것 같다.
“이언 태터솔에 따르면, 그들은(150만 년 전 그 또는 그녀) 수천 개의 손도끼를 만들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돌도끼를 밟지 않고는 걸을 수 없는 곳도 있습니다. 손도끼는 만들기가 아주 까다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부지런했던 유인원’
미래를 향해 옷깃을 여미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미래를 향해 옷깃을 여밀 줄 아는 사람이다. 거듭된 실패를 딛고 인권과 정의를 지켜냈듯 대한민국의 미래가 실패의 축적을 기반 삼아 과학으로 열릴 것이라 확신했다. 2019년 1월14일, 대전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 특별시 보고회에서 선도형 경제로의 전환을 선언한 대한민국 최초의 연설을 했다.
“이제 우리 앞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세계 모든 인류가 그 새로운 세계를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비로소 우리는 동등한 출발점에 섰습니다. 뒤따라갈 필요도 없고 흉내 낼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만들면 그것이 세계 표준이 될 수 있습니다. (…)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입니다. 추격형에서 선도형 경제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과학기술 혁신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 과학기술의 많은 위대한 발견은 연구 전에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들입니다. 연구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 연구수행 과정과 성과를 함께 평가하겠습니다. 성실한 실패를 인정하고 실패의 경험까지 축적해나가겠습니다.”
“추격형에서 선도형 경제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문장을 문 대통령이 연설문에 연필로 꾹꾹 적어넣었다. 이 한 문장을 국민에게 내놓기까지 많은 사유와 데이터 분석이 뒷받침됐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 희망과 용기를 모두 담고자 했다. 얼마 뒤 문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들에게 선물한 이정동 교수의 책 <축적의 길>에 그 생각의 단초가 담겨 있었다. 책 사이에는 “이제 새로운 세계를 우리가 설계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실패를 우리 모두의 경험으로 만들면 ‘나’의 성공이 우리 모두의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축적의 길 도서를 권장하며”라는 작은 메모가 동봉됐다. 시행착오의 귀한 경험은 결국 사람에게 차곡차곡 쌓인다. 또한 그 과정에서의 위험을 되도록 많은 사람이 나눠 감당해야 한다. 지금은 우리끼리 승부를 겨룰 때가 아니다. 손을 잡아야 할 때다.
권력 주변을 서성인 탓에, 자주 정권교체의 책임에 직면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기한 절차적 공정과 문재인 대통령의 선한 동기를 조용히 말해보지만 결과에 대한 당위와 촛불의 실패를 주장하는 목소리 앞에 늘 주눅이 든다. 그렇다고 반칙과 특권 없는 사회를 이루려던 두 대통령의 꿈이 국민 마음에서도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단지 덜 축적됐고 합의에 이르는 방법에 미숙할 뿐이다. 축적의 시간이다. 달게 견뎌야 한다.
그 가운데 중력파 연구를 위해 ‘라이고 과학협력단’에 참여한 과학자 1천여 명의 여정을 좇아가봤으면 한다. <중력의 키스>에서 해리 콜린스는 역사적 발견을 검증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설렘과 불안, 은근한 경쟁까지 가감 없이 담아냈다. 조롱의 언어를 반성하게 한다.
스티븐 호킹을 추모한 잊히지 않는 문장
2018년 3월14일, 신의 계획서를 훔쳐봤다는 스티븐 호킹 박사가 숨졌다. 그때 문 대통령의 과학에 대한 이해, 과학과 관련한 독서가 어떻게 진정성 어린 조사로 태어나 국민에게, 세계인에게 전해지는지 봤다. 잊히지 않는 문장이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광활한 우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시간과 우주에 대한 인류의 근원적인 물음에 대답해왔습니다. 우리는 우주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우주에서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호킹 박사가 21세부터 앓기 시작한 루게릭병을 극복한 것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장애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인류 과학역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갔지만 인류의 물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세계인과 함께 애도합니다.” ―2018년 3월14일 문재인 전 대통령 페이스북 글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대통령의 독서: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으로 5년 내내 연설문을 썼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 연설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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