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30cm 물드는 단풍길, 설악산·주흘산·대암산 [ESC]
우리 눈엔 빨강·초록·파랑 가시광선을 인식하는 원추세포가 있다. 한가지 원추세포당 100개 색을 구분한다. 인간은 세 가지 원추세포를 통해 100만 가지 색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 중 약 3억명은 일곱 색 무지개를 구분하지 못한다. 원추세포 이상 때문이다. 적록색맹이면 빨강을 짙은 갈색, 초록을 옅은 갈색으로 본다.
2008년 도널드 맥퍼슨은 레이저 수술용 보안경을 개발하던 중 재미 삼아 친구에게 써보라고 했다. 친구가 잔디에 놓인 ‘오렌지색 러버콘’을 보며 말했다. “러버콘이 보이네!” 7년간 연구 끝에 색각이상 보정 안경이 출시되었다. 처음 쓴 이는 말문을 열지 못했다. 내뱉는 감탄사는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그러다 북받치는 눈물을 터트렸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다니! 지는 노을이 이토록 붉다니! 숲이 이토록 푸르다니!” 대학 동기들에게서 안경을 선물 받은 프란시스는 가을 캠퍼스에서 눈물 흘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단풍잎이 이토록 붉다니!”
한국의 가을은 신비 그 자체
내 친구 아내의 고향은 베트남이다. 그에게 물었다. “한국에서 가장 보고픈 게 무엇이었나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의 가을요!” 그래, 내가 인도차이나를 여행하던 2년간 산, 숲, 가로수는 늘 초록이었지. 귀국 후 만난 가을은 아름다움 이상이었다. 한국의 가을은 그에게 신비 그 자체였으리라.
봄꽃과 반대로 단풍은 북에서 물들어 남하한다. 남하 속도는 초속 30cm, 나는 백두를 물들인 후 한라로 가는 단풍과 동행하기로 했다.
단풍철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산은 설악이다. 신흥사, 백담사를 비롯해 천불동, 비선대, 토왕성 폭포를 찾는다.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단풍이 탐방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흘림골이 개방됐다. 첫 단풍 이후 오색지구 주차장이 연일 가득 찼다. 아침 8시 첫 타임에 입장했다. 관광버스 도착 시각과 겹치면 사진 찍을 여유도 없을 게 뻔했다. 흘림골에서 주전골로 이어지는 일방로지만 곳곳에서 정체구간이 발생한다는 소식이었다. 등선대 갈림길에 이르자 초등학생이 더는 못 오르겠다고 투덜댔다. 전망대서 내려오던 이가 아이를 보며 말했다. “저길 안 보고 가면 후회할 거야!”
가파른 돌계단, 철계단 지나 전망대 위에 섰다. 서북 능선, 바다, 한계령휴게소가 내려다보였다. 활엽수가 부피를 줄이자 공룡의 뿔 같은 암봉들이 도드라졌다. 전망대서만 2시간을 보냈다. 돌아서는데 바람이 모자를 벗겼다. 한 번 더 보고 가란 뜻이겠지. 단풍철마다 설악산을 다녔지만 늘 감탄한다. 바위, 나무, 폭포를 갖고 내 마음대로 만들어보라고 한다면 지금의 설악산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조물주가 암봉, 숲, 폭포를 옮길 힘과 기회를 주더라도 손 놓고 풍경을 누리리. 설악은 완벽한 산이다. 인간이 케이블카를 놓는 등 망치지만 않는다면.
강릉에 들렀다. ‘짜이’(인도식 밀크티)를 마시러 갔다. ‘명주상회’ 문고리를 비틀었다. 잠겼구나.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결혼식에 가서 한 시간쯤 지나야 문 열 거예요.” 주인장이 돌아왔다. 행인은 그의 후배였다. 잔 끌어안고 짜이를 음미했다. 히말라야의 바람 냄새가 났다. 갠지스의 태양 맛이 났다. 시린 손도 마음도 녹았다. 일어서는데 주인장이 말했다. “정암사 가는 길이면 두엄 스님께 짜이팩을 전해줄래요?”
후두두, 가을비 내리는 삽당령을 넘었다. 태양의 ‘직사광’ 대신 구름의 ‘반사광’에 나무들의 색이 더욱 선명했다. 저마다 다른 색으로 꼿꼿한 자태를 드러냈다. 감탄하는 사이 정선 사북, 고한 지나 정암사에 도착했다. 두엄 스님이 함백산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정상에 닿았을 때 안개가 들불처럼 치솟았다. 장관이었다. 발걸음 옮기는 스님에게 부탁했다. “잠시 그 자리에 있어 줄래요?” 찰칵. 스님, 이 안개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요?
눈가가 붉은 건 단풍 때문이지
도량석 소리에 잠이 깼다. 법고 소리, 종소리가 파주 보광사 시절로 나를 이끌었다. 효림 스님, 봉문 스님 곁에서 여름, 가을, 겨울을 보냈더랬지. 하루는 풍경을 사서 처마 밑에 달았더랬지. 달 뜨면 풍경소리에 홀려 마당을 어슬렁거렸지. ‘…때로는 달빛 속에서 속절없이 부처도 흩날린다. 삼라만상이 절로 아름답거늘 다시 무슨 깨우침에 고개를 돌리랴. 밤이면 처마 밑에 숨어서 큰스님의 법문을 도둑질하던 저 물고기는 보름달 속에 들어앉아 적멸을 보고 있다.’ 이외수 작사, 이남이 곡 <풍경>을 처음 들은 것도 그때였다. 꽃도, 낙엽도, 바람도, 달도, 풍경소리도, 나도, 너도 부처임을 안다면, 더 무슨 깨우침이 필요하겠는가. 이외수 선생은 지금 어느 행성의 달 속에 가부좌를 틀고 있을까?
비 그쳤으니 영화 〈헤어질 결심〉 촬영지로 가자! 동강의 언덕에 차를 세웠다. 이곳을 여러 차례 방문한 이도 영화에 나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낭떠러지 끝 고사목이 있는 곳. 강원도 정선 몰운대. 시인들은 ‘세상의 끝’ 혹은 ‘사랑의 발원지’로 묘사하곤 했다.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가 바위 비집고 나오던 길 지나 절벽에 섰다. 서래가 질곡동 사건 범인의 마음을 알아채고 단언하던 대사를 떠올렸다. “죽을 만큼 좋아한 여자네!” 산오(박정민)는 서래의 마음을 읽는 열쇠다. 두 사람은 사랑 앞에서 타인의 견해, 법률적 심판, 죽음조차 개의치 않는다. 산오는 이 말을 전해달라고 해준에게 부탁한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단풍 아니면 문경 가는 길이 공허했으리라. 물드는 산하를 보려면 내비게이션을 ‘무료도로’로 설정하는 게 좋다. 빌딩과 인파로 가득한 도시뿐 아니라 낮은 집들로 이뤄진 마을을 보게 되리라, 차량을 바라보는 노인을 만나게 되리라, 그러다 고향 부모님 떠올라 눈앞 흐려지면 잠시 쉬었다 가는 거지. 눈가가 붉은 건 단풍 때문이라며.
문경 유수산장 주인은 출타 중, 객 홀로 깃들었다. 테라스에 앉았다. 노랗게 물든 주흘산이 보였다. 해 저무는 동안 서양식 풍경인 윈드 차임이 영롱한 소리를 냈다. 유수산장에 다시 들른 이유였다. 윈드 차임 옆엔 물고기 풍경도 있었다. 산장 처마 밑의 물고기도 이순 지나 ‘종심소욕불유구’(마음 가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에 이른 주인장의 법문을 훔쳤으리라. 파란 하늘 헤엄치던 물고기가 화르르 타오르며 적멸에 드는 낙엽을 바라보았다.
밤새 단풍이 아래로 내려왔다. 수직으로 하루 50m씩 움직인다던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무들이 차츰 물드는 듯했다. 길을 떠났다. 합천에서 나고 자란 지인이 운석마을(적중면과 초계면)을 조망하려면 대암산 패러글라이딩장에 가보라고 했다. 가파른 길을 올랐다. 추락방지턱이 없는 까닭에 단풍 쳐다볼 새도 없었다. 꼭대기에 섰다. 분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공상과학영화 속 풍경 같았다.
5만 년 전 유성이 대기권을 통과한 후 지구와 충돌했다. 운석 충돌 구덩이는 호수가 되었다가 물길이 생기며 담수가 빠져나갔다. 분지 사람들은 둘러싼 산마다 이름을 붙였다. 천황산(687m), 미타산(662m), 대암산(591m), 오봉산(338m)…. 운석이 충돌하면서 생긴 테두리였다.
해 저물고 아무도 없었다. 까마귀 떼가 날아올랐다. 고립무원의 밤, 하늘엔 오리온, 카시오페이아, 북두칠성, 페르세우스, 시리우스…. 정수리 위에 화성이 선명했다.
밤사이 단풍이 25㎞ 남하했다. 창원 가는 길도 색색으로 물들었다. 낙동강 지나며 크리스 마이어를 떠올렸다. 그는 강물 소리를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 9월 그와 함께 자전거 타고 강변을 달렸다. 그는 떠났고 작품만 남았다.
빨강·주황…수많은 색의 세상
창원의 성산아트홀로 갔다. 작가 김윤철의 ‘태양들의 먼지Ⅱ’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전력이 공급되는 한 끊임없이 그림이 그려지는. 낯선 충격 때문에 발걸음 옮길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컴퓨터 블루스크린으로 뒤덮인 조형물이 있었다. 3디(D) 영상으로 제작된 2700프레임 중 한 프레임을 입체화한 이용백의 ‘엔에프티(NFT) 박물관(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연달아 충격을 받자 머리가 어질했다. 이어지는 이완의 ‘고유시’를 비롯해 목진요, 노진아, 배성미…. 드디어 ‘6전시실’에서 크리스의 작품을 만났다. 그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강물에 녹음기를 내리고 들으면 많은 소리가 들려. 동물, 식물, 물방울 터지는 소리, 엔진 소리, 기계 소리…. 공장지대와 자연 지대의 소리가 다르지. 낙동강 지점마다 다른 소리를 낼 거야. 나는 그걸 녹음하고 싶어. 강물 소리조차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아.”
11월 20일까지 ‘2022 창원조각비엔날레’ 전시가 이어질 도시에서 이 글을 쓴다.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작품들은 지금껏 보지 못한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가을이 하는 일을 인간의 세계에선 예술이 한다. 다채로운 색의 세상. 종종 그것을 막으려는 자들도 있다. 롤링 스톤스는 베트남전쟁 중 죽어서 돌아온 행렬, 검은 관들을 보며 반어적으로 노래했다. ‘페인트 잇 블랙.’ 진정 자유로운 사회는 빨강, 주황, 보라색을 비롯해 인간이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100만 가지 색을 칠할 자유까지 포함하는 사회다. 색각이상 보정 안경을 처음 쓴 이들이 말문 잊은 채 감동하는 건 세상이 한두 가지 색이 아니라 수많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 노동효 〈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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