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화초, 감사일기…소확행으로 무기력 탈출[김종석의 굿샷 라이프]

김종석 기자 2022. 11. 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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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골프 소녀 리디아 고 부활
10대 고속질주 후 번아웃 극복
달리기와 요가, 워라밸 중시
결과 보다 과정, 단기 목표에 집중
10대 골프 천재 소녀로 이름을 날린 리디아 고, 20대 초반 슬럼프를 겪은 그는 결과 보다 과정을 중시하면서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리디아 고 인스타그램

최근 ‘번아웃’을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동아일보와 설문플랫폼 SM C&C ‘틸리언 프로’가 지난 7월 20~60대 남녀 156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34.7%, MZ세대의 43.9%가 번아웃을 겪었다고 한다.

번아웃은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계속돼 무기력증이나 불안감, 우울감이 생기는 현상을 뜻한다. 안지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번아웃은 정신과적 진단은 아니어서 학자마다 다르게 이야기 하지만 피로감 또는 무기력감, 공감능력 저하, 냉소, 의욕 상실, 흥미 저하, 이유 없는 잔 통증, 업무 효율 저하와 같은 증상을 보인다”고 말했다.
●10대 시절 LPGA투어 15승 돌풍

10대 시절 일찌감치 골프 천재로 주목받은 리디아 고. 동아일보 DB

리디아 고(25)는 천재 골프 소녀로 화려한 10대 시절을 보낸 뒤 20대 들어 슬럼프에 허덕였다. 10년 전인 2012년 15세로 LPGA투어 정상에 처음 선 뒤 이듬해 프로에 전향했고 2015년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그의 나이 18세 때다. 10대에 수집한 LPGA 우승 트로피만 해도 15개에 이른다. 최초, 최연소 기록 제조기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된 2017년부터 정상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3년 가까이 무관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너무 이른 나이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번아웃에 발목이 잡혔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에서 열린 BMW레이디스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리디아 고. BMW 코리아 제공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뚫고 재기에 성공했다. 리디아 고는 지난달 말 강원 원주시 오크밸리CC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BMW레이디스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시즌 2승째였다. 그가 한 해 두 번 이상 우승한 것은 19세 때인 2016년 이후 6년 만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6세 때 뉴질랜드로 이민을 간 리디아 고는 “모국에서 꼭 우승하고 싶다는 꿈을 이뤘다”며 기뻐했다. 12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의 아들과 결혼을 앞두고 잊지 못할 추억도 만들었다.
●유명인, 일반인 가리지 않는 심신 탈진 증상

BTS도 비슷한 이유로 지난 여름 활동 중단까지 선언했다. 이같은 번아웃은 유명인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일반 학생, 직장인들도 지나친 경쟁 구도, 코로나 19 장기화 등으로 심신의 탈진을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번아웃에 대한 해법은 뭘까. 업무나 성취의 기준을 현실적으로 정하고 과정을 중시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 조언이다. 거창한 계획 보다는 일상에서 의도적으로 쉼을 찾고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의 리스트를 만들어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번아웃 극복 방법
안지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삼성서울병원 제공
-생체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건강한 루틴 만들기 : 수면 위생(특히 일어나는 시간을 일정하게 하여 빛에 노출되는 시간과 생체시계를 맞추기), 건강한 식단, 꾸준한 운동(하루 30분 이상 땀이 날 정도로 빠르게 걷는 것만으로도 우울, 불안 경감 효과가 있음)

-작지만 반복적인 성취를 통해 자기 효능감 키우기 : 하루 10분 산책, 하루 1번 식물 가꾸기, 매일 감사일기 쓰기

-업무와 휴식의 온(on)/오프(off)를 확실히 하기 : 업무시간 외 컴퓨터나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시간을 제한하기, 머릿속의 이미지로 회사의 셔터를 내리거나 전구를 끄고 나온다고 생각.

-현실적인 목표 세우기 : 단순히 먼 미래의 성공, 승진, 우승 등 보다는 일주일, 한달 간격으로 단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추진.

-명상, 마음 챙김, 심호흡 : 생각과 신체의 이완을 돕고, 현재의 상태의 집중하게 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는 효과가 있음

-스스로의 마음을 꾸준히 들여다보기

-증상이 심하면 실제 우울증이나 불안증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전문가 상담 받기.

(도움말 : 안지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다걸었던 리우 올림픽 이후 급격한 추락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골프에서 은메달을 딴 리디아 고(왼쪽), 금메달리스트 박인비(가운데), 동메달리스트 펑산산. 동아일보 DB

리디아 고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이후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박인비에 이어 은메달을 목에 건 뒤 2016년 하반기 아시아 지역 4개 대회에서 한 번도 톱10에 진입하지 못했다. 당시 시즌을 마친 뒤 리디아 고는 “잊지 못할 시즌이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클럽을 쳐다보지 않고 쉴 생각이다. 골프채도 내가 싫을 것이다”라고 아쉬워했다.

2019년 12월부터 리디아 멘털을 담당한 코치심리전문가인 정그린 그린코칭솔류션 대표는 “리디아는 가장 큰 목표를 두고 전념했던 올림픽이 끝난 뒤 인생의 혼란함을 느꼈다. 앞으로의 길이 없는 것에 대한 허무함도 컸다”고 말했다. 뭔가를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있으나 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진 상태였다는 것이 정그린 대표의 진단이었다.

리디아 고 뿐 아니라 스포츠 무대에서는 어린 나이에 정상의 고지에 오른 뒤 좀처럼 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하거나 계속 최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리다 소리 없이 사라진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운동선수들은 하나의 목표를 통해 극도의 노력을 하는데 결국 기억되는 우승자는 한명뿐이고, 경기력을 통해 스스로를 계속 증명해야 하는 압박 상황이 지속된다는 것이 일반인들과 다른 점으로 꼽힌다. 평소 긴장을 풀고 자기만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우승과 선수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갈등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 동아일보 DB

안지현 교수는 “리디아 고 뿐 아니라 오사카 나오미(테니스), 마이클 펠프스(수영) 같은 천재 운동선수들의 사례를 보면 우승과 선수 자신을 동일시하는 결과가 많다. 경기가 선수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라 선수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운동선수나 일반인들이나 업무나 성취의 기준을 현실적으로 정하고 이것들이 내가 원하고 주도하는 인생 여정 가운데 ‘목표’가 아닌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안 교수의 진단이다.

안교수는 또 “특히 어린 선수들은 정신발달학적으로도 잘 성숙하기 위해서 유년기, 청소년기, 초기 성인기 등에 성취해야 하는 과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안정적인 또래 관계, 자아정체감, 경쟁과 협동, 신뢰감 형성 등”이라고 강조했다. 보통 훈련과 게임에만 집중하다 보면 이런 일상적인 발달 과정들을 놓치는 경우가 있으므로 동년배들이 성취해 나가는 기본적인 발달 과정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코치나 부모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다.

●“10km 달리기로 스트레스 해소”

리디아 고는 요가를 통해 심리적 안정과 함께 유연성을 강화했다. 리디아 고 인스타그램

리디아 고는 작은 목표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의욕을 되찾았다. 그는 “결과가 아니라 어떤 부분을 향상시킬 수 있을지에 몰입했다”고 말했다.

해마다 페어웨이 안착률과 그린 적중률을 모두 70% 이상 기록할 수 있도록 훈련하자는 식이다. 몸은 더욱 단단히 만들었다. 탄수화물 섭취를 최대한 줄이고 단백질을 보충하는 식이요법으로 근육량을 7㎏ 늘렸다. 매일 아침 10㎞를 달리고 요가, 필라테스로 코어 근력과 유연성을 강화했다. 악력을 키우려고 록클라이밍도 했다. 코로나19로 외부 활동조차 힘들어지면서 미국 플로리다 주 자택에 피트니스 기구를 들여놓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홈 트레이닝에 매달렸다. 리디아 고는 “뛰는 것을 싫어했지만 뛰면서 스트레스가 풀렸고 속에 있던 것들이 밖으로 분출되는 느낌이 좋았다”고 말했다.

워라밸을 중시한 그는 쉴 때는 K팝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기며 독서와 신앙생활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인생은 흔히 마라톤에 비유된다. ‘소확행’이라고 했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지친 몸과 마음을 채워주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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