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영의 정사신] '무고한 희생'의 정치화, '그 입 다물라'
'이태원 압사 참사' 국가 시스템 구멍 드러내
여야 정치권, 국민 희생됐을 때만 '안전한 대한민국' 목소리
[더팩트ㅣ이철영 기자] 이태원 압사 참사. 못다 핀 꽃 수백 송이가 가을 하늘로 흩뿌려졌다. 뭐가 그리 급해 그리도 빨리 가야만 했을까. 남은 사람들은 아쉬움이 아니라 '단장'(斷腸,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게 견딜 수 없는 심한 슬픔이나 괴로움)의 아픔에 하루하루가 고통이다. 그래도 참사 희생자 가족의 슬픔을 대신할 수 없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56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2022년 대한민국에서 이런 참사가 벌어졌다는 것에 세계도 놀랐다. 테러도 아닌 거리 위에서 사람이 압사 당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런 참사가 발생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경찰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지난달 29일 오후 6시 34분, 한 시민은 112에 이태원 골목 상황을 설명하며 경찰의 통제 필요성을 설명했다.
"사람이 내려올 수 없는데 계속 밀려 올라오니까 압사 당할 거 같아요 겨우 빠져나왔는데 이거 인파 너무 많은데 통제 좀 해 주셔야 될 거 같은데요."
신고받은 경찰관은 "사람들이 교행이 잘 안되고 압사 밀려서 넘어지고 그러면 큰 사고 날 것 같다는 거죠?"라며 출동해 확인하겠다고 답했다. 약 1시간 30분 후 112로 비슷한 내용의 신고가 또 접수됐다. 30분 후에도 그리고 10시 11분 신고자는 "여기, 압사될 것 같아요, 다들 난리 났어요"라며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태원 참사 당일 112 신고 녹취록 공개 내용이다.
만약 경찰이 초기 신고 접수 후 적극적으로 경력을 투입했더라면 이런 참사가 발생했을까. 가정이지만, 아마도 이런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경찰 대응에 격앙하고, 여야 정치권이 경찰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통령이나 정치권도 이번 참사를 가볍게 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통령과 정치권이 앞다퉈 이번 참사에 목소리를 키우는 모습을 보며 당연함과 함께, '그동안 뭘 했나?'라는 질문도 떠오른다. 이태원 참사가 충격적인 건 건물이 무너지지도, 배가 침몰하지도, 비행기가 추락하지도, 땅이 꺼지지도 않은 그냥 거리에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국민의 생명이 사라질 때마다 정치권은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해왔다. 이런 정치권이 내놓은 국민과 약속 결과는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다. 여야를 떠나 정치권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정상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경찰의 이태원 참사 대응 실패는 말할 필요도 없는 지경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에 따르면 보고체계는 무너졌고, 현장에 있었어야 할 담당자도 없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어이가 없다. 소관 부처인 행정안전부 이상민 장관 스스로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됐고, 코로나19가 풀리는 상황이 있었지만, 그전과 (비교해) 특별히 우려할 정도의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며 "경찰 병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수준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윤 대통령과 정부는 이번 참사 책임의 주체다. 따라서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안부 장관, 윤희근 경찰청장,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이번 참사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해야 한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여야 정치권이다. 국민이 그들을 선출한 것은 이번 참사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고,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할 수 있도록 법률적 미비점을 개선하라는 것이었다. 그런 일 하라고 뽑아줬다. 그런데 여야 정치권은 무엇을 했나? 문제의 법안 재·개정보다는 당의 당리당략에 정쟁에 대부분 시간을 허비해왔다. 아니라고 변명하겠지만.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나 현장을 찾아 묵념하고 국화꽃 한 송이를 올리며 눈물 흘리는 그런 모습만을 바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참사 현장에서 유족 앞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라는 말할 자격이 정치권에는 없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국회법 제24조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69조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선서하는 대통령과 300명 국회의원들. 156명의 젊음의 꽃이 진 이태원 참사 앞에 국가도 없었지만, 정치 역시 없었다. 정치권은 이제 추모의 시간을 끝내고 추궁의 시간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시간 정치권은 얼마나 국민을 갈라놓고, 얼마나 실망만 시킬까. 아니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라는 말은 어느 순간 없던 말이 될 게 뻔하다. 그러다 선거가 다가오면 또 언급될 것으로 예상한다.
안전한 대한민국은 정치가 정쟁이 아닌 국민의 삶 속에 있을 때 가능하다. 입으로만 떠드는 정치가 이번 참사를 만들었다. 8년 전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또 이런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도 여야 할 것 없이 정치권은 또 많은 말을 한다. 차라리 그 입을 다물라.
cuba2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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