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알리려 화약 모아 2회 발파"… 광부들, 희망의 끈 놓지 않았다

나광현 2022. 11. 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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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광산 기적 생환 광부 아들  인터뷰]
"서로 의지하며 다잡은 뒤 생존 도구들 찾아"
"젖은 나무 산소용접기로 말려 모닥불 피워"
"작업장에 남은 화약 모아 총 2회 직접 발파"
"두 사람 구조 뒤에도 '같이 있겠다' 2인실로"
경북 봉화군 아연 광산 매몰 사고로 고립됐던 작업자 2명이 10일 만인 4일 오후 11시 3분께 무사히 구조되고 있다. 이날 생환한 고립자들이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오고 있다. 소방청 제공

경북 봉화군 아연 광산 지하 갱도에 '221시간' 동안 매몰돼있던 두 광부는 '우당탕탕' 굉음과 함께 고립을 인지한 순간부터, 구조대원들을 만나 갱도를 나오던 마지막 순간까지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한 순간도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이 생환하는 과정에선 '27년 경력 베테랑' 광부인 선산부(작업반장) 박모(62)씨의 빠른 상황 판단과 적극적 생존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박씨 아들에 따르면 박씨는 광산업 경력이 길지 않아 불안해하는 후산부(보조 작업자) 박모(56)씨에게 "살려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독려한 뒤, 탈출로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빠져나갈 마땅한 길이 보이지 않자 상황이 장기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선산부 박씨는 비닐과 젖은 나무, 톱, 산소 용접기 등 생존 도구를 끌어 모았다. 비닐로 방풍막을 치고 젖은 나무를 산소 용접기로 말려 모닥불을 피워 체온을 유지했고, 커피믹스를 밥처럼 먹으며 버텼다.

고립 기간 중 지하에서 5회 정도 들려온 발파 소리는 희망의 신호가 됐다. 구조 가능성을 끝까지 믿은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작업장에 남은 화약을 모아 2회에 걸쳐 직접 발파하기도 했다. 비록 발파 소리는 구조대에 닿지 않았지만, 생존에 대한 이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 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 광부는 같은 작업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연이 깊은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하 갱도에 갇힌 뒤 서로 의지하면서 '영혼의 단짝'이 됐다. 병원에선 두 사람에게 각각 1인실 전원을 제안했지만, 두 사람 모두 2인실에 남고 싶다고 요청해 같은 공간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다음은 작업반장 박씨 아들과의 일문일답.

-사고는 10월 26일에 발생했지만, 업체가 119에 신고한 건 그로부터 14시간 지난 27일이다. 가족 분들은 언제 처음 사고 사실을 알게 됐나.

"27일이다. 회사 전화를 받은 어머니가 먼저 알았고, 어머니가 나에게 울면서 전화해 나도 그 때 알았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심경은.

"화가 많이 났다. 토요일(29일) 오전엔 아버지가 구조될 거라 했는데 실패했고, 며칠간 구조 상황이 답답하게 흘러갔다. 구조 과정도 윤석열 대통령 지시가 내려오고, 경북도지사가 현장을 찾기 전까진 가족들에게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업체는 시추 작업도 처음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생존을 확인하기 위한 1차, 2차 시추가 실패했는데.

"너무 답답했다. 20년 전 도면을 갖고 작업했으니. 나중에 업체에서 듣기론, 전문가 불러 측량해서 (기계를) 꽂을 수 있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성공하려고 일단 20년 전 도면을 믿고 작업했다고 하더라."

-생환한 아버지는 사고 순간을 기억하고 있나.

"작업 중이었는데, 갑자기 '우당탕탕' 굉음이 났다고 한다. 다 무너지는 소리가 나니까, 아버지가 '이거 수상하다'해서 같이 있던 보조 작업자 분과 확인하러 갔더니 그쪽(제1수직갱도)이 다 무너져 있었다고 한다."

-붕괴를 확인한 아버지는 어떤 행동을 했나.

"같이 들어간 분이 경력이 짧다. 광산에 온 지 4일쯤 됐다고 들었다. 그 분이 제일 당황해하니 아버지가 '여기서 우리가 살려면 이제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고 얘기하면서, 제2수직갱도로 통하는 탈출로가 있는지 다닐 수 있는 곳은 다 다니면서 찾아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다 막혀 있었고, 결국 '여기서 생존을 해야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이후 생존을 위해서 한 행동은.

"생존 도구를 모았다. 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로 천막을 쳤다. 톱을 찾아 주운 나무를 잘랐지만, 나무가 젖어 있어 불이 잘 안 붙었다고 한다. 마침 그곳에 산소 용접기가 있었고, 아버지가 갖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여 젖은 나무를 말려 생존했다고 한다. 다만, 아무리 불을 피워도 많이 추웠다고 한다."

-생존 위치는 어떻게 정했나.

"그 안에 환기는 잘 돼서 산소 걱정은 없었다고 한다. 가장 우선한 기준은 체온 유지였다고 한다. 물이 안 떨어지고, 안 고여있고, 바람이 덜 부는 곳을 찾아서 자리잡으셨다고 한다."

-지상과의 연락은 시도하지 않았나.

"평시엔 수직갱도를 타고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전선이 연결돼있어 인터폰으로 연락한다. 하지만 그 장소가 매몰되며 장비가 붕괴돼 연락은 처음부터 어려웠다."

-아버지가 구출되고 '왜 사흘 밖에 안 됐는데 사람들이 많이 왔냐'고 하셨다고 한다. 시간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

"시계는 있었는데,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 따로 계산하지 않으셨던 걸로 안다. 너무 어둡다보니 시간 개념이 없어진 것 같다."

-물과 커피믹스가 생존에 큰 도움이 됐다고 들었다.

"물 10리터랑 작업하다 쉬실 때 드시려고 커피믹스 몇 개를 챙겨 들어갔다고 한다. 정확히 몇 개를 어떻게 나눠드셨는지는 아직 못 들었다. 다만 가지고 들어간 물이 다 떨어진 뒤에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지하수를 물통에 받아서 마셨다고 한다."

-아버지 대처가 상당히 침착한데, 27년 경력이면 과거에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나.

"본인이 직접 겪으시진 않았다. 다만 당신이 일하던 1980~90년대가 근무환경이 열악하던 때다 보니 간접적으로 매몰 현장을 보셨다. 그래서 그때 경험이 도움이 된 것 같다. 따로 교육을 받았다기보단 경험에서 우러나온 대처다."

-같이 들어간 보조 작업자 분과는 원래도 잘 아는 사이였나. 더 각별한 사이가 됐을 것 같은데.

"같은 작업조가 된 지 며칠 안 됐다고 한다. 다만 구조되고 병원에 올 때 처음에 2인실을 썼다. 병원에서 1인실이 났으니 옮겨줄 수 있다고 했는데, 두 분이 그냥 같이 있고 싶다고 해서 지금도 그대로 같이 계시다.(웃음) 아버지도 상황이 불안했지만, 보조 작업자 분을 많이 다독이고 진정시키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래서 보조 작업자 분이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아래 계실 때 구조대의 발파 작업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나.

"그렇다. 아버지 말로는 발파 소리를 총 5번 정도 들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그 안에서 발파를 2번 정도 하셨다고 한다. 작업장에 발파할 수 있는 화약이 좀 남아있었다고 한다. 비록 구조대는 아버지의 발파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괭이로 10m 정도를 파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확하지는 않다. 어느 정도 파긴 했지만, 아직 아버지도 정확히 어디를 팠는지, 우리가 구조하려고 했던 지점을 팠는 지는 정확히 말씀을 못한다."

-감사 인사를 전할 곳이 있다면.

"가장 많이 고생하며 구조에 힘써주신 아버지 동료분들, 같은 업종이라고 달려오신 직원 분들께 감사하다. 끝까지 옆에서 다독여주신 구조대, 정부 부처 관계자 여러분께 모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안동= 나광현 기자 nam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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