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3주 동안 사과만 4번…갈 데까지 가는 SPC

이혜미 기자 2022. 11. 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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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늦은 밤, 갑작스러운 보도자료


4일 밤, 고용노동부가 출입기자들 이메일로 보도자료를 보냈다. 사전에 배포한 주간 보도 일정에는 포함되지 않은 자료였다. 자료 제목은 '고용노동부, SPC 계열사의 기획감독 방해에 대해 엄청대처 예고'였다. 내용을 보니 기가 막힌다.
고용노동부 보도자료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11월 3일 오전 10시 대전고용노동청에서 SPC삼립세종생산센터 현장 감독 과정에서 감독관들이 현장감독으로 회의실에 없는 틈을 타서, 해당 회사 직원이 감독관의 서류 등을 뒤져 대전고용노동청 감독계획서를 무단 촬영하여 사내 메신저 등을 통해 SPC삼립 본사 및 불특정 SPC 계열사 등에 공유한 사건이 발생했다.

* 대전고용노동청 감독계획서에는 대전고용노동청의 감독일정, 감독반 편성, 전체 감독대상 사업장(64개) 목록이 기재되어 있음

정리해보면, SPC삼립의 아무개 직원이 자기네 회사 현장 감독하러 온 고용노동부 감독관의 서류를 몰래 뒤져 사진을 찍은 다음 이걸 여기저기 뿌렸다는 얘기다. 잇단 인명 사고가 발생해 소비자로부터 외면받고, 노동부의 특별 기획감독을 받고 있는 사업장에서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밤새 논란이 확산하자, 5일 오전 SPC삼립은 황종현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을 냈다. 회사는 해당 직원을 즉시 업무에서 배제했고, 경위가 확인되는 즉시 신속하고 엄중하게 징계 조치한다고 했다. 고용노동부 자료 배포 이후 사과문이 나오기까지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정신을 못 차린 건지 안 차리는 건지

SPC그룹은 지난 3주 간 언론사 경제면뿐만 아니라 사회면에 가장 많이 등장한 기업이다. 지난달 15일 제빵 계열사 SPL 사업장에서 20대 노동자가 소스 배합기에 끼여 숨졌다. 일주일 뒤에는 샤니 제빵공장에서 40대 노동자가 손가락 끼임 사고를 당했다. 

잇단 사고 소식만으로도 SPC를 향한 소비자의 눈이 매서워지는데, SPC는 불 난 데 기름까지 부었다. 사망 사고를 수습하기도 전에 노동자들을 공장에 투입해 작업을 강행했고, 사망한 노동자 빈소에는 빵을 보냈다. 사망 사고 발생 이튿날엔 영국 런던에 파리바게뜨 첫 매장을 열었다는 홍보 자료도 냈다.

심지어 사망 사고 경위를 취재하는 기자에게 "제목에서 SPC를 빼줄 수 있겠냐"고 요청하는 일까지 있었다. (▷
[취재파일] 공식 사과하더니…"제목엔 SPC 빼 달라") SPC의 이 기막힌 요청은 유통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여겨지며 두루두루 회자되고 있다.
[ 원문 링크 : https://news.sbs.co.kr/d/?id=N1006935877 ]

 

애꿎은 가맹점주들은 무슨 죄

SPC그룹의 계열사는 모두 68개에 달한다. 계열사 산하에는 우리가 아는 수많은 브랜드가 있다. 빵을 기본으로 아이스크림, 떡, 음료, 레스토랑까지 SPC 브랜드는 식음료를 망라한다. 각 브랜드와 계약을 맺은 가맹점 수는 많게는 수천 개로, SPC를 대표하는 파리바게뜨 가맹점은 전국에 3,500여 곳이나 된다.

SPC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한 이후, 가맹점주들은 사정이 어려워졌다. 사망 사고 직후부터 매출이 20~30%씩 빠졌다. 회사가 빨리 문제를 수습하고, 소비자들의 마음을 돌려놔야 점주들은 생업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점주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본사가 오히려 피해를 증폭시키고 있으니, 점주들은 말 그대로 죽을 맛이다.

 

공허한 사과, 책임은 아래로 향한다

지난달 15일 이후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SPC그룹은 4번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중 한 번은 허영인 그룹 회장이 직접 국민 앞에 고개 숙인 대국민 사과였다. 사고 발생 후 매번 그래 왔듯, 거취에 대한 입장표명은 없었다. SPC는 사과문에서 "깊은 책임을 통감한다", "철저히 반성한다",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라고 했다. 진심으로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하며 피해자와 국민께 죄송한 건지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고용노동부는 감독관 자료를 무단 촬영하고 내부에 공유한 SPC삼립 직원을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다. 또 산업안전보건법상 감독관의 점검 방해에 대한 과태료(최대 1,000만 원)도 부과할 예정이다. SPC는 무단 촬영한 직원을 징계하겠다고 했는데, 개인의 일탈로 '꼬리 자르기' 하려는 건 아닌지 의문이 남는다. 명확한 사실 관계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밝혀질 것으로 본다.

이혜미 기자para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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