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의 일렁이는 마음의 산[영감 한 스푼]

김민기자 2022. 11. 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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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의 일렁이는 마음의 산,
생트빅투아르①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민 기자입니다.

오늘의 ‘영감한스푼 클래식’은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준 작가 폴 세잔의 시대로 떠나보겠습니다.

‘세잔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대미술을 알 수 없다’고들 하죠. 세잔의 그림이 없었다면 피카소도 없었고, 피카소로 가능했던 이후의 수많은 새로운 시도들도 연결고리를 잃게 됩니다.

그럼에도 세잔의 그림은 한 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도 그의 그림을 처음에는 머리로만 이해했고, 작품의 시각적 언어를 받아들이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 그림을 본 경험이 많지 않았기도 했고, 그림에 관한 설명도 복잡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세잔의 그림을 최대한 쉽고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레터를 준비해보았습니다. 오늘 레터를 찬찬히 살펴보신다면, 앞으로 이야기 할 현대미술도 좀 더 쉽게 접근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 19세기 말 프랑스와 유럽으로 떠나보겠습니다.산을 마주하다 죽고 싶었던 화가

세잔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때 갖고 다녔던 화구와 모자, 우산.
1906년 10월 어느 날. 67살 화가 폴 세잔은 그날도 늘 그랬듯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풍이 몰아쳤고, 화가는 급히 짐을 챙겨 이동합니다. 그러나 나이든 화가가 화구와 캔버스, 이젤을 들고 가기에 비바람은 너무 거셌습니다. 집으로 향하던 화가는 결국 길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몇 시간이 지나고 쓰러진 그를 세탁소 사장이 발견해 마차에 싣고 집으로 데려옵니다. 화가를 진찰한 의사는 감기에 걸렸을 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그를 안심시킵니다. 다음날 화가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다시 심하게 앓게 된 화가는 이후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납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살던 세잔은 홀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화가가 바라는 것이었답니다. 세잔은 프랑스어로 ‘대상을 마주하다가’(sur le motif) 죽고 싶다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이 ‘Sur le motif’라는 프랑스어는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모델이나 과거의 그림이 아닌 실제 풍경과 생활 속 인물을 보고 그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즉 내가 그릴 대상을 직접 눈으로 마주하고 관찰하는 것이 내 생의 전부이자, 그것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의미였죠. 그의 바람은 이렇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년의 화가가 이렇게 야외를 고집하며 천착한 주제는 바로 그가 어린 시절부터 자주 찾았던 ‘생트빅투아르산’입니다. 세잔은 1870년대부터 말년까지 생트빅투아르산을 주제로 회화 36점, 수채화 45점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일렁이는 마음의 산을 그리다

폴 세잔, ‘생트빅투아르산’, 1902-1906년. 사진출처: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그럼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 그림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이 그림을 봤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치 조각천을 짜깁기한 ‘패치워크’처럼 색면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산의 지형도 그렇고, 산 아래 마을의 집과 나무도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색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죠. 빅투아르산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비교하면 그림의 특징이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생트빅투아르산의 모습. 정확히 같은 위치는 아니지만 상상력을 더해 비교해봅시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사진이 순간의 빛을 포착해 반사되는 작은 입자까지 남겼다고 한다면, 세잔의 그림은 풍경을 좀 더 몽글몽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진은 찍히는 순간이 얼어붙은 느낌을 주는데 반해, 세잔의 그림은 산과 나무와 집들이 서로 부딪치는 색깔로 이뤄져 일렁이며 진동하는 느낌을 자아냅니다. 산이 보이는 풍경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묘하게도 사진이 아닌 그림이죠.

세잔을 존경했던 후배 화가 에밀 베르나르는 그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세잔의 방식은 보통과 완전히 다르며 복합적이다. 그는 그림자 한 면으로 시작해, 두 번째면, 세 번째 면을 쌓아 올렸다. 그러면 색깔들이 서로 매달려 대상의 색뿐 아니라 형태도 드러냈다. 작품의 방향은 조화의 법칙에 따라 정해졌고, 전체 그림은 이미 세잔의 마음 속에 완성되어 있었다는 걸 알수 있었다. 그는 태피스트리를 만드는 장인이 그랬을 것처럼, 연관된 색들이 서로 이어지도록 그리다가 어느 순간 반대되는 색이 맞물리도록 했다.”
다른 그림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폴 세잔, ‘생트빅투아르산과 큰 소나무’, 1887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 그림에서도 위로 솟아오르는 나무와 수평선으로 휘몰아치는 나뭇가지,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산세와 지그재그 모양으로 펼쳐진 마을이 생동감을 자아냅니다. 자세히 보시면 나무의 기둥과 가지가 자아내는 수평 수직선이 산과 마을에서 각기 다른 모양으로 반복되며 리듬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요. 몇 가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 될 듯합니다.

폴 세잔, ‘생빅투아르산과 큰 소나무’, 1887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네 이런 비슷한 모양의 모티프들이 마치 음악처럼 반복되면서 서로 상응하고, 그러면서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 방식이 혁신적인 이유는, 풍경을 단순히 사진처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화가가 한 인간으로서 눈으로 보고 ‘이해’한 바를 그림으로 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해’라는 부분이 중요한데요. 우리가 무언가를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단순히 사진기가 광학적으로 빛을 받아들이는 것과 달리,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반영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세잔이 산을 그릴 때, 아카데미 화가가 사용하는 원근법이나 인상파 화가들이 빛의 표현 방식에만 집중한 것과 달리, 그는 어릴 적부터 친구와 함께 뛰어 놀았던 산의 기억, 그리고 도시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주는 심상과 같은 것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어릴 적 세잔은 절친이었던 소설가 에밀 졸라와 함께 오래도록 걸으며 이야기하고, 생트빅투아르산으로 들어가 계곡에서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삶의 진실’을 찾고 싶어 했던 소년들은 속물적 세상을 벗어나 자연에서 스스로에게 집중했던 것이죠. 졸라의 소설 ‘작품’에는 이런 시간들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도 등장합니다.

폴 세잔, 수영하는 사람들, 1874–75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무의식 중에 느낀 친밀감과 희미하게 느껴지는 야망, 높은 지성을 향한 깨달음이 세 친구를 묶어 주었다. … 친구들은 아직 초등학생이었지만 오랜 시간 산책하기를 즐겼다. 학교가 일찍 파하면 몇 마일씩을 걸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교외로 가 며칠 동안 집 밖을 다니기도 했다.

이들은 나무와 언덕, 시냇물에 대한 동경을 가졌고, 홀로 자유로워지는 것의 무한한 기쁨을 알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소위 말하는 ‘세계’로부터 탈출구를 찾았고 본능적으로 자연의 품으로 향했다. … 계곡 깊은 곳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고, 하루종일 옷을 입지 않은 채 뜨거운 모래 위에 누웠다가 다시 물로 뛰어들면서 수초를 잡고 장어를 쫓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어린 시절의 나를 품어준 산, 넓게는 땅의 역사를 담고 있는 산을 제대로 담기 위해서는 사진으로는 역부족이겠죠. 세잔은 어떤 나무는 크게 그리고 또 어떤 길은 임의로 숨기거나 드러내면서 조정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래서 순간포착한 사진과 달리, 세잔이 눈과 마음으로 보았던 산을 우리는 그림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잔의 이런 그림은 어떤 맥락에서 탄생하게 된 것일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주에 이어가보겠습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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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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