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폭력의 시간 버텨온 마음, 어머니의 닭백숙에…

한겨레 2022. 11. 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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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와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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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정으로 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까. 도저히 언어화할 수 없었고 꺼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 단단히 각오하지 않고서는 발화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이야기들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잘 수신한 것은 맞는지, 여전히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30년간 고집스럽게 카메라를 들고 버틴 이가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지극정성으로 우려내어 전해주는 이야기는 끝내 압도적이다. <디어 평양>(2006)과 <굿바이, 평양>(2011)에 이은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로 완성된 양영희 감독의 ‘가족 다큐멘터리 3부작’이 그렇다. 짧지 않은 세월을 지나 양영희는 드디어 이 장대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오사카에서 제주로 다시 오사카로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첫 작품이었던 <디어 평양>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일본 오사카의 재일조선인으로 평생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활동에 헌신했던 아버지 량공성씨는 반주 한 잔을 걸치고 기분 좋게 딸 양영희에게 말한다. “네가 데려오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괜찮으니 결혼을 해라. 다만 일본인이나 미국인은 안 된다.” 그리고 내복 차림으로 앉아 ‘제주자랑가’를 부르는 모습이 이어진다. 다큐멘터리의 도입부는 전작을 보지 않았던 관객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임과 동시에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가장 정치적인 가족 멜로드라마이자, 양영희의 러브 스토리이며, 가족의 뿌리인 제주에 대한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디어 평양>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감독은 오랜 시간 아버지와 불화했는데, 북조선에 충성하는 아버지와 달리 그는 어느 쪽인가 하면 아나키스트에 가까웠다. 특히 1971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도했던 북송사업을 통해 오빠 셋이 모두 북조선으로 ‘귀국’하면서 부모에 대한 원망이 마음속에서 차근차근 자라났다. 하지만 10년이 넘도록 카메라를 경유해 아버지와 만나면서 양영희는 그와 화해하게 된다. ‘기록하는 자’라는 이름을 변명 삼아 양영희는 아버지에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을 꺼낸다. “(아들) 세명을 전부 (북으로) 보내서 후회해?” 아버지는 선선히 말한다. “가지 않았으면 더 좋았으려나, 그렇게는 생각하지.” 강요당한 이데올로기의 전쟁 속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진실한 목소리가 카메라에 포착된다.

200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딸은 어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의 분신과도 같은 카메라가 그 시간을 담아낸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별히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양영희의 마법 같은 (혹은 오랜 시간 다큐멘터리스트로서 혹독하게 훈련해온) 카메라와 함께 어머니의 삶을 덮고 있던 장막이 한 꺼풀 벗겨진다. 시간은 늘 남자의 신체를 따라 흐른다고 상상되고, 그러므로 도저한 역사의 흐름이란 그저 남자들만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일 때도, 역사의 굽이굽이에는 늘 행위자로서 여자가 있었다.

가족들을 위해 미래가 없는 것처럼 ‘지금’만을 살면서 북에 있는 가족에게 보낼 생필품 상자를 싸는 것. <디어 평양>에서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그 사랑, 그 고생만이 어머니의 전부는 아니었던 셈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상자에는 어머니가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여 역사를 만들어가는 방식이 담겨 있었다. 감독이 그 이야기를 발견하면서 가족 다큐멘터리 3부작의 마지막 피스가 완성된다. 닭백숙 수프(국물)를 끓이는 마음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온 어머니.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바로 그 강정희씨에 대한 이야기다.

다큐는 어머니가 제주 4·3 사건의 생존자임을 알리는 강렬한 증언과 함께 시작한다. 오사카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1945년 미군 공습을 피해 부모의 고향이었던 제주로 피난했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것은 물론 인종차별도 없었던 제주. 그곳에서 평생을 살리라 생각했던 것도 잠깐이었다. 1948년 4·3 사건이 발발한다. 의사였던 약혼자가 한라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에 동참하고 결국 사망하면서, 어머니는 제주를 탈출해 다시 오사카로 돌아온다. 그리고 한평생 그 비밀을 가슴에 품은 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매우 파편적인 증언의 기록”이라서 촬영을 시작한 지 4~5년이 지나도록 장편 다큐가 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새로운 인물이 양영희의 인생에 등장한다. 애인 아라이 가오루다. “어머니의 넷째 아들이 되겠다”며 웃는 그는 새로운 청자가 되어 어머니와 감독 사이에 부드러운 완충지대가 되어준다. 어머니는 가오루가 집에 올 때마다 5시간을 푹 고아서 국물이 뽀얗게 우러난 닭백숙을 준비했다. 가오루 역시 조리법을 배워 어머니를 위해 백숙을 끓인다. 어머니와 애인은 “생각이 달라도 같이 밥을 먹는” 가족이 된다. 동북아시아 근현대사의 폭력 그 자체를 내화하고 있는 양영희의 가족이 그 시간들을 끝까지 살아낼 수 있었던 마음과 힘이 어머니의 오래된 수프 조리법 속에 녹아들어 있다.

뜨거운 증언 이후 기억 잃어가는 엄마

2017년 어머니는 ‘제주4·3연구소’ 연구자들에게 3시간에 걸쳐 기억을 꺼내놓았다. 처음으로 그의 말이 실체적 사실관계 안에서 증명되고 역사적 위상을 인정받은 시간이었다. 다큐에는 8분 남짓 등장하는 이 뜨거운 증언 이후, 그의 기억은 급속도로 쇠락한다. 알츠하이머가 찾아온 것이다. 양영희는 이 시간을 지나 2018년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를 찾아 4·3의 고통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비로소 ‘강정희’라는 심연과도 같은 역사에 대한 겸손한 목격자가 된다. 한번도 어머니의 총련 활동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가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족 다큐멘터리 3부작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걸 무릅쓰고” 이곳에 당도한 이야기다. 4·3이라는 지옥을 무릅쓴,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무릅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당할지도 모르는 위협을 무릅쓴, 온갖 오해들을 무릅쓴,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우리의 무능을 무릅쓴. 우리가 이 각오들을 작품과 함께 나눠 감당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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