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확장]국가보안법과 재일동포 1 - 한통련
[편집자주] [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 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지난 10월25일부터 28일까지 필자는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소속 이철, 강종헌, 이동석, 그리고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통련)의 김창오, 이철, 최성일, 이준일씨와 동행하는 행운을 가졌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협회(민변)를 비롯한 4개 시민단체와 함께한 행사였다. 이 행사의 주된 목적은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재일동포’를 위로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3박4일이란 짧은 시간 충분한 위로와 존경이 됐는지는 그분들의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다. 소박하지만 의미 있고 작지만 정성이 가득한 시간을 만들고자 애썼다. 그러나 정작 '다시 만나요' 손을 흔들며 돌아선 그들의 등을 보며 무거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있기 때문이다. 잊지 않기 위해 여기에 그 숙제를 기록해 둔다.
4·19혁명이 재일조선인 청년들에게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고 한다. 독재정권을 민중의 힘으로 끌어내린, 어딘가 책에서나 볼 법한 사건을 '조국 민중'이 해냈다. 식민지 종주국 일본에서 가난과 차별, 혐오와 모욕에 시달리던 재일동포 청년들에겐 충격이었다. '민주화'에 눈을 뜨게 됐다. 하지만 민단 지도부는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4·19가 폭도들의 소행이란 비난 성명을 냈다.
봄날은 짧았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는 민단 중앙 단장 선거가 있던 날에 벌어졌다. 일제 시대 만주국 검사를 지낸 권일이 민주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그는 당선과 동시에 쿠데타 지지 성명을 냈다. 이에 저항해 민단 내 민주파가 주도하던 '재일대한청년단'은 쿠데타 반대 성명을 냈다.
권일은 "반권(反權·권일 단장 반대)은 반박(反朴·박정희 반대)이다. 그리고 반박은 반국가"란 논리로 억눌렀다고 한다.
'재일대한청년단'은 이름을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으로 바꾸고 곽동의가 단장을 맡았다. 민단 민주화와 조국 민주화 2가지 사명을 재일동포 청년들은 기꺼이 어깨에 짊어졌다.
박정희의 중앙정보부(KCIA)는 민단 민주화는 커녕 민단이 군사독재 유지의 시녀가 되길 원했다. 그리고 민단 지도부는 이에 호응했다. 굴욕적인 한일조약(1965년)은 동포들의 원성을 샀고 그런 기류 속에 1971년 민단 중앙 단장 선거가 다가왔다. 당시 중앙정보부 7국장 출신 김재권 주일 공사가 민단 단장 선거에 개입했다.
당초 선거 판세는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민단 민주화 세력의 유석준 후보가 압도적으로 당선될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러나 김재권이 유석준과 총련의 유착 의혹을 제기하면서 판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결국 중정과 박정희를 지지하는 이희원이 단장이 됐다. 그리고 선거 직후엔 예정했던 수순 대로 민단 지도부는 민단 도쿄 본부, 가나가와 본부에 ‘직할 처분’을 내렸고 '한청'의 산하단체 자격을 취소했다. 유석준을 지지했거나 민단 민주화를 위해 싸운 전·현직 간부들을 대거 청소한 것이다.
그 시기 나타난 사람이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득표율 45.25%를 얻어 53.19%의 박정희에게 아깝게 졌다. 부정선거로 얼룩진 선거판에서도 예상 외 선전을 거둔 신민당 당수 김대중은 곧바로 위협 인물이 됐다. 여기에 더해 대선 한 달 뒤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예상을 깨고 개헌 저지선인 69석을 넘어 89석을 확보하는 이변까지 일으킨다. 결국 정상적으론 정권 유지가 어려워진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해 종신 집권 체제를 노린다. 때마침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해외 망명을 결심했다.
당시 배동호, 곽동의 등 민단 민주화 세력은 김대중과 함께 해외 민주 세력 결집을 위해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결성을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한민통 결성을 1주일 앞둔 1973년 8월8일 느닷없이 김대중이 도쿄 한복판에서 사라졌다.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KCIA가 김대중을 호텔에서 납치해 태평양에 빠트려 죽이려던 사건이다. 그 후 김대중은 8월13일 밤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자택에 구금됐다.
한청을 중심으로 재일동포들은 김대중 구출 운동을 백방으로 펼쳤다. 1973년 8월15일 김대중을 초대 의장으로 추대해 그의 빈자리를 옆에 두고 한민통을 발족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을 타도하고 기필코 민주화를 달성하겠단 의지의 표현이었다.
매우 간략하게 한민통의 민주화 투쟁에 대해 얘기해 보자. 1970년 청계 피복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재일동포 청년들은 이를 세상에 알리고자 움직였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어머니'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1978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 8주기를 맞이해 첫 상영회를 했고 일본 곳곳에서 700회 상영, 40만명 이상이 관람했다. 열악한 한국 노동계의 현실에 분노한 일본의 노동 진영이 한국 노동운동과 손잡는 계기가 됐다.
박정희에 이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1980년 5·17조치를 감행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김대중은 민주화 운동의 '배후 조종' 혐의로 연행돼 9월17일 '내란음모 및 반국가 단체 결성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법으론 '내란음모'는 무기징역이 최고형이었다. 그가 사형을 선고 받은 건 '반국가단체 결성 수괴'란 이유였다. 그 반국가 단체가 바로 '한민통' 이었다.
한민통은 김대중 석방 운동과 더불어 5·18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도 전념했다. 다시 '한국 1980년'이란 기록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고 결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실상을 전하며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됐다.
그 외에도 한민통은 1987년 6월 항쟁, 남북의 화해와 통일 운동 등 해외 민주 통일 세력의 근거지 역할을 담당해왔다. 한민통은 1989년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으로 개칭한다.
김대중의 사형 선고를 가능케 했던 것은 한민통의 반국가단체 규정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어느 법문에 그런 규정이 있을까.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민통, 한통련은 반국가단체로 규정돼 있다. 그 계기가 있다.
1977년 소위 '학원침투 재일동포 간첩 사건'이 터졌다. 1970년대 초반부터 군사독재 정권이 틈만 나면 희생양으로 써 먹던 재일동포 간첩 사건 중 하나였다. 이때 체포된 재일동포 유학생이 김정사. 박정희 정권은 김정사가 간첩이고, 그가 '한청'의 회원은 아니지만 강연회에 참석했으며, 그의 선배가 한청의 상급단체 한민통 회원이었다고 지적했다. 한 마디로 간첩이 연관돼 있는 단체이니 '반국가단체'란것이다. 이듬해 1978년 김정사는 간첩죄로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엔 한민통이 '반국가 단체'로 못박혀 있다.
2년 뒤 김대중에게 '반국가 단체 수괴' 혐의를 씌워 사형을 선고하게 한 법적 근거도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이 문구는 한통련 회원들의 족쇄가 돼 30년 넘게 한국 땅에 들어올 수도 없었고 일본에서 외국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여권 발급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 국적자이면서도 여권을 받을 수 없었다. 김정사는 2013년 재심으로 무죄, 김대중도 2004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김창오는 대한민국 국적의 재일동포다. 현재 한통련 사무장을 역임 중이다. 대학 때 만난 한청을 통해 정체성에 눈을 떴고 1987년 6월 항쟁 때 주일 대한민국 대사관 앞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여 일본에서 구속된 유일한 재일동포로 동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조국을 알면 알수록 사랑에 빠졌고 조국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조국을 사랑하면 할수록 조국은 나를 내치고 더욱 멀어져 갔다."
세월이 지나 한통련의 원점인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지만 왠지 그의 재임 기간 동안에도 한통련은 여전히 입국 불허 상태였다. 겨우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3년이 돼서야 입국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정식 여권은 발급되지 않았다. 소위 '임시여행증명서'(단수 여권)를 발급 받았을 뿐이다. 그 이듬해부터 정식 여권을 발급 받았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여권을 통한 '박해'가 시작됐다. 외교부는 10년짜리 여권을 발급하다가 갑자기 1년, 3년, 5년짜리 여권만 발급하는 것으로 바꿨다. 신원조사도 병행했다. 여권 갱신 기간만 되면 영사관을 찾아야 하고, 영사관은 여권 갱신을 빌미로 한통련 탈퇴를 압박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한국의 민변 등 많은 시민단체가 함께 싸웠다. 결국 2021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가 한통련 입국 불허는 헌법 제14조 '거주 이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시정을 권고했다. 이후 한통련 회원들은 10년짜리 정식 여권을 발급받아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게 영속적이란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다. 국가인권위의 시정권고는 어디까지나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하란 것이지 한통련이 '반국가 단체' 인지 아닌지를 판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2021년 8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화위)에 한통련의 반국가 단체 여부에 대한 진실을 규명해 달라고 요청해놓은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 2023년 2기 진화위가 활동을 마무리한다. 윤석열 정부 들어 한반도의 긴장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지금 이 순간도 한통련의 발목을 붙들고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지긋지긋하다.
somangcho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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