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지 않는 국가에 묻는다…우린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
사회적 참사 방치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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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30분, 절규와 통곡이 휩쓸고 간 새벽의 이태원은 을씨년스러웠다. 유흥의 거리이기에 사건·사고야 종종 있었겠으나, 한순간에 이토록 수많은 죽음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을 테다. 어두운 골목에서 파란 담요에 덮인 주검들이 나왔다. 경찰과 구조대, 목격자와 기자들. 둘러싼 이들은 많았지만 대체로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한참 침묵을 지키다 옆의 친구를 바라보며 입을 연 20대 청년의 앳된 얼굴에는 핼러윈의 유흥을 더하기 위해 피범벅 상처로 분장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처음엔 사고로 인한 상처인 줄 알고 흠칫 놀랐다. 곧 화장임을 알 수 있었던 건, 어지러운 눈물선들로 흐릿해져 말라붙은 자국이 보였기 때문이다.
축제의 공간이 공포의 현장으로
즐거워보려고 한 것이 잘못일까. 어안이 벙벙한 젊음들은 그날 밤 오래도록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맴돌았다. 욕지기를 참지 못해 술을 토하는 소리와 간간이 흐느끼는 울음이 귀를 건드렸다. 취재 메모를 정리하러 들른 건물 지하에서 몸을 움츠린 채 아침을 기다리는 어린 생존자들을 마주쳤다. “그냥 놀러온 건데….” 그들은 전화를 잡고 하소연하듯 눈물을 쏟아냈다. 가지 않는 밤이 그들에겐 공포였다.
지난달 29일 밤 12시를 갓 넘긴 시각, 취재 지시를 내리는 전화를 받았다. 전날 밤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오던 불안한 소문들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 있었다. 뒤늦게 택시를 타고 달려가 도착한 곳은 익숙한 장소였다. 다만 그 순간은 공기가 아주 낯설었다. 흐느끼며 걸어가는 사람들, 드문드문 흩어진 물병과 나동그라진 신발들, 실려가는 담요 아래로 힘없이 늘어진 팔다리. 사고는 순식간에 그 공간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사건이 발생한 29일 밤을 기점으로 한국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재난의 배경에 한 장면이 추가됐다. 빌딩이 즐비하고 자동차가 다니는, 평범한 일상이 전개되는 대도심의 한복판이 그것이다. 산사태나 홍수, 지진이 아님에도 그저 서 있는 자리에서 156명의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죽어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평범한 저녁의 유흥과 일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재난의 장소로 여기기 어려운 곳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한 충격은 컸다. 전례 없는 사건에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혼란스러운 평가들이 제멋대로 쏟아졌다. 재난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으면 ‘언젠가는 나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증폭되기 마련이다. 어떻게든 이유를 찾기 위해 돌던 화살은 결국 예외적 상황을 만든 피해자와 생존자들에게로 꽂히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유족들은 저마다 피해자들이 이태원 현장에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공부만 하다가 모처럼 놀고 싶어서”, “혼자 하는 일이다 보니 북적이는 곳에 가고 싶었을 것 같아서…”.
‘죄책감’의 씨앗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그렇게 심어졌다. 하지만 ‘놀기 위해’ 집을 나섰던 청년들에게 잘못이 있을까. 이번에 죽거나 다친 청년들의 다수는 학창 시절 세월호 참사의 목격자였던 세대다. 이들은 또 수학여행을 비롯한 단체행사들이 취소되는 경험과 안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경직된 사회 분위기에 숨을 죽여야 하는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다. 최근 3년은 코로나19로 흥겨움을 표출할 사회적 분출구들이 틀어막혔다. 함께 모여 열광할 공연이나 문화생활에서부터 작게는 지인들과 삼삼오오 모여 소소한 수다를 떠는 일조차 죄악시되던 때도 있었다.
녹사평 광장에 마련된 애도의 현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집이 근처라서 자주 지나다니는 길인데, 생수라도 들고나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내 일이었을 수도 있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 했다는 게….” 20대 김아무개씨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매일 밤마다 자신을 무겁게 짓누른다고 토로했다.
살아남은 이들의 자책과 눈물
그 밤의 비극 앞에서 그들은 죄책감에 시달릴 만큼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 많은 시민들이 눈앞의 죽음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을 뿐이다. 사건 당일 이태원에서 친구들과 물 뿌리기, 심폐소생술(CPR) 등 구조활동을 했다고 말한 심윤희(22)씨는 그 장면이 떠올라 잠을 자지 못한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모두가 나서서 도와주려고 했어요. 정말 다들 도와줬어요. 하지만 이미 골든타임을 놓쳐서….” 심씨는 울음을 애써 참으려고 했다. “눈물 흘리는 제 자신이 제일 위선적인 것 같아요. 어쨌든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요.” 그들은 종내에는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자책하고 있었다.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목이 쉬도록 소리치며 울먹이는 경찰의 영상이 시선을 모으기도 했다. 비극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조하고, 거리를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태원파출소 소속 김백겸 경사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때 내가 더 현명한 판단을 했다면, 정말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자꾸 후회가 든다”고 말했다. 어떻게든 팔을 걷어붙이고 나온 이들은 자신의 힘이 부쳤을 뿐인데, 죄의식의 그림자를 오롯이 덮어쓰고 말았다.
정작 국가는 그 거대한 책임 방기에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 발생 4시간 전부터 ‘압사당할 것 같다’는 등 위험 징후 신고가 11건 접수됐지만, 경찰은 4건만 현장에 출동한 사실이 드러났다. 시민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직접적으로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국가가 외면한 셈이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저버렸다는 첫번째 증거다.
비극 그 이후, 마땅히 책임을 느껴야 하는 직책에 있는 이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국무총리실의 지시로 정부는 ‘이태원 참사’를 ‘이태원 사고’로, ‘희생자와 피해자’를 ‘사망자와 부상자’로 통일해 쓰라고 지침을 내렸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태원 참사는) 경찰과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책임론에 대한 질문에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고 선을 그었다.
책임을 묻는 질문을 말장난으로 받는 경우도 있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1일 이태원 참사 관련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통역 관련 문제가 있어 죄송하다”는 공지를 들은 뒤 “이렇게 잘 안 들리는 것에 책임져야 할 사람의 첫번째와 마지막 책임은 뭔가요”라며 웃었다. 앞서 기자가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 책임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흉내 내 말장난을 한 것이다.
그렇게 누구도 생존자와 목격자들의 죄책감을 덮어주지 않았다. 대신 정부는 책임이 유실된 공간을 ‘애도’로 채우려 했다. 애도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행위다. 슬픔의 농도를 높여 침묵을 이끌어내고자 한 셈이다. 공무원들에게는 글자가 쓰여 있지 않은 검은 리본을 달라는 지시를 내렸고, 애도 기간에는 정치화와 비판을 멈추라며 눈치를 줬다.
사건 바로 다음날부터 이태원 거리에는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았다. 굳게 닫힌 유리문에는 ‘마음 깊이 슬퍼하며 피해자들을 애도한다’는 쪽지가 붙었다. 한 가게에 들어섰다. 주위 가게들이 많이 닫았더라는 말에 사장은 눈을 피했다. “먹고는 살아야 해서….” 황급히 주방에 들어서는 그의 뒷모습이 눈에 아렸다. 슬픔을 증명하기 위해 생존을 위협받아야 하는 이들도 있다. 끔찍한 죽음들 앞에서 시민들은 익숙한 생계를 챙기는 일마저 민망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억눌린 분위기 속에 무언가 해소되지 못한 채로 취재 삼일째가 됐다. 병원엔 아직 빈소가 차려지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가족을 안치실에만 두어야 했고, 어떤 이들은 장례식장이 꽉 찬 병원을 뒤로하고 또 다른 병원을 찾아 경기도 일산, 의정부, 양주로 흩어졌다. 왜 우리 아이를 이렇게 멀리까지 보냈냐는 애끓는 유족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장례식장이 가득 차는 동안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은 비어갔고 그 틈새로 ‘무기력’이 들어섰다.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거대한 상실 속에서 무기력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애를 쓰고 있다. 출퇴근 시간 붐비는 지하철에서 핼러윈의 죽음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사람들과의 간격을 유지해보고, 또 일부는 심폐소생술을 배워 또 다른 재난에 대비하겠노라 마음먹는다. 허망함 속에서 거대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는 일을 각자가 견디는 게 이번 사고의 최종 결말이어서는 안 된다.
당사자가 아닌데도 힘들어할 자격이 있나, 간혹 원망의 시선까지 받아가며 죽음에 따라붙는 우리의 내면은 아직 무사한가. 의지가 됐던 것은 함께 현장을 목격한 동료들이었다. 스산해진 현장 뒤의 골목에서, 죄인처럼 앉아 있어야 하는 병원에서, 붉어지는 눈시울들이 오가는 분향소에서 만나면 인사처럼 ‘괜찮냐’는 질문을 건넸다. 함부로 털어놓을 수 없는 응어리진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건 커다란 위로였다. 어쩌면 이 거대한 참사를 함께 지켜보고 고통스러워하는 시민들도 이미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는 동료들일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국가에 책임을 묻는 일이다. 2명에서 59명으로, 120명으로, 156명으로. 전광판에 적힌 사망자의 숫자는 끊임없이 바뀌어왔다. 수치는 되돌릴 수 없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게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경찰의 만류에도 한 이태원 상인이 희생자를 위해 제사상을 차리고 “밥 한끼라도 먹여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건, 자조와 슬픔 속에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울분이었을 것이다. 죄책감 속에 무기력해지는 것만이 애도의 방식은 아니다. 더 이상 국민들은 책임감 없는 국가를 참아주지 않을 것이다.
김지은 기자 quicksil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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