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위기관리,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2022. 11. 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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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임금이 지아비라고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내 그들을 살려야 하겠소. 그대들이 죽고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

영화 ‘광해 : 왕이 된 남자’의 대사입니다. 왜 이 대사가 갑자기 생각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동료의 장인상이 있어 상가에 갔습니다. 장례식장 호수를 찾기 위해 큰 모니터를 보다가 약간 놀랐습니다. 고인의 영정 사진 가운데 두 명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아 그 친구들이구나’ 싶었습니다. 25세, 30세. 한 명은 취업을 위해 찍은 사진이 영정 사진이 됐습니다. 한쪽에서는 다른 젊은이가 벽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또 수많은 젊은이들을 어이없이 하늘로 보냈습니다. 이들에게 국가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이태원 참사 등 2022년 한국에서 벌어졌다고 믿기 힘든 사건을 다뤘습니다. 이 사건의 원인 등을 다루는 것은 수사에 맡기고 위기와 위기 대응, 위기관리 측면에서 접근했습니다. 몇 가지 포인트를 소개하겠습니다.

첫째,‘징후 없는 위기는 없다.’ 사건에는 항상 전조가 있습니다. 유명한 피닉스 메모의 예를 들겠습니다. 2001년 초 미국 연방수사국(FBI) 특수 요원 케네스 윌리엄스는 민간 항공 대학교 연수생 가운데 이슬람계 숫자가 급속히 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직관적으로 패턴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적시하고 “민간 항공학교 목록을 작성하고 테러와의 연관성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상부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두 달 후인 9월 11일 오사마 빈 라덴에 의한 뉴욕 쌍둥이 빌딩 폭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테러범은 미국 항공학교에서 연수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이태원 참사도 일어나기 전 시민들의 신고 등 다양한 징후가 있었지만 이는 무시당했습니다.

다음은 위기관리의 첫째 단계인 사과입니다. 2014년 땅콩회항 사건 이후 한국 사회에는 위기관리 전문가가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카카오는 불통 사태 이후 첫 기자회견에서 “화재는 예측할 수 없었다”는 발언으로 욕을 자초했고 SPC는 직원이 사고로 사망했지만 뒤늦은 사과로 빈축을 샀습니다. 이태원 참사에서는 최고책임자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으로 분노를 키웠습니다. 국민의 마음을 달래줄 진심어린 사과는 없었습니다.

사건들을 쭉 보면 “내 책임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알리바이 커뮤니케이션’이 진심어린 사과를 대체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한 컨설턴트는 “위기 대응은 다이어트와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살빼는 방법을 수십 가지 알지만 이를 실행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의미입니다. 입으로는 떠들지만 위기 상황이 벌어지면 매뉴얼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문화가 매뉴얼을 먹어 치워 버립니다. “이걸 어떻게 상부에 보고하냐”, “인정하면 나중에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지배합니다. 위기 경보가 울려도 책임지고 “당장 인원을 통제할 기동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비상벨을 누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리더십의 문제도 고개를 내밉니다. 리더의 어원 가운데 ‘먼지를 먼저 뒤집어 쓰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리더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지지만 공짜는 없습니다. 진화론적으로는 전쟁 등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우수한 DNA를 종족에 남기기 위해 리더에게 수많은 혜택을 준다고 합니다. 공동체를 지키는 데 앞장서는 것이 미션이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벌어진 위기 상황에서 이런 결단을 내리는 리더는 찾기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 위기 대응 영역에서 다시 살펴봐야 할 사례로는 ‘보스턴 스트롱’이 있습니다. 2013년 4월 15일 체첸공화국 출신 이민자 형제가 보스턴 마라톤 대회 당일 결승선 근처에서 폭발물을 터뜨려 26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각종 국가 기관과 시민들이 힘을 합쳐 부상자들을 살려내고 이후 악몽같은 사건을 함께 극복합니다. 병원에 실려간 부상자는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2002년터 가동한 국가사고관리시스템(NIMS) 덕이었습니다. 위기 현장에서 서로 다른 지역과 부처 소속 공무원들이 단일한 통제에 따라 효율적으로 협력하는 체계입니다. 또 당시 보스턴 경찰서장은 테러가 일어나기 7년 전부터 시민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정보를 공유했습니다. 훈련된 보스턴 경찰서 커뮤니케이션 팀은 테러 상황에서 시민들의 협조를 이끌어 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수년간 각종 행사 때마다 위기관리 대응 훈련을 꾸준히 해 왔다는 점입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위기 대응 사례로 기록된 비결은 준비의 힘이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참사를 겪으며 무엇을 배우고 준비했을까. 2022년은 가장 슬픈 가을로 남게 될 듯합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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