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스완 김진태 [금융당국 24시]
[편집자주] 자유시장경제 근간인 금융과 관할 당국에 관한 이야기
가스가 퍼진 밀폐된 방에서 라이터를 켜는 건 폭발을 자초하는 행위다. 미국발 금리인상으로 살얼음판을 걷던 채권시장에서 김진태 강원지사가 벌인 정치행위는 시장을 망가뜨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 후의 즉각적인 대응이다. 시장과 금융에 몰지각한 지방정부와 정치인 출신 단체장은 그렇다고 치고, 대체 금융 엘리트로 이뤄진 중앙정부는 뭘 했느냐는 것이다. 강원도와 김진태의 발언이 나온 즉시 중앙정부가 그것을 이른바 '금융시장 문란행위'로 규정하고 패널티 예고와 함께 시장에는 무제한 지급보증을 하겠다고 구두로라도 대응했다면 지금 이꼴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투자자들이나 외국인 입장에선 지방정부나 중앙정부나 다 같은 '국가'로 인식한다. 하지만 지방정부가 사고를 쳤을 때, 수습에 나섰어야 할 중앙은 없었다. 추경호 기획재정부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미국 출장 중에 한가로운 말투로 말했다. "강원도 문제는 강원도가 대응을 해야 하고, 아직 그 여파가 확산될 단계는 아닌거 같지만 관심을 갖고 살펴보겠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국정감사장에서 '물타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 (레고랜드) 사태는 복합적인 부분이 작용했다고 본다"며 "특정 요인에 의해 이렇게 됐다고 보는 건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했다. 야당 의원이 "김진태 지사를 감싸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자, 김 위원장은 레고랜드 사태가 그것(지급보장 미연장) 때문에 생긴 건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지금의 위기가 복합적인 것은 사실이다. 세계경제는 미중 대결과 우크라이나 전쟁, 인플레이션 압력과 금리상승으로 폭발 직전인 것이 분명이다. 그리고 국내적인 폭발의 트리거는 누가 당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일촉즉발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분명한 건 이번 사태의 블랙스완*은 김진태 지사였다는 것이다. 그걸 정치논리로 인식해 여권 정치인 출신이라고 정부가 감싸고 있으니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됐다고 볼 수 있다.
2000억원으로 막을 수 있던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는 채권시장 붕괴로 이어져 정부가 50조원 규모 채권시장안정펀드 대책을 내놓아야 할 수준으로 번졌다. 그래도 얼어버린 시장이 녹지 않자 금융위는 그제서야 민간금융지주사 팔을 비틀어 95조원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국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긴축 시기에 대규모 감세안을 내놨다가 금융시장을 망가트렸고 그 일로 44일만에 사임했다. 이 나라에선 최근 석 달간 레고랜드 사태와 이태원 참사가 경제와 정치를 잠식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화살이 돌아올 걸 우려한 정부는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해 엄숙을 강요하는데, 그러는 사이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처음으로 연말연시 소비 대목을 기대했던 민생과 자영업은 더 크게 파탄날 위기에 처했다.
2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를 다시 75bp 인상하자 3일 국내 금융시장에선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영구채) 조기상환(콜옵션) 미행사에 이어 DB생명보험이 조기상환일을 연기했다. 영구채는 통산 5년 만에 상환해야 하지만 룰을 어긴 것이다. 당국은 이에 대해 "계약을 변경한 것"이라고 대변했다. 둘 다 여력이 되는 회사인데도 사전에 엄중경고해 바로 잡은 게 아니라 대충대충 넘어가준 것이다.
기재부 국제금융국은 올해 매년 성공하던 외국환평형기금채권도 발행하지 못했다. 최근 4년간 계속 금리 스프레드를 줄여왔는데 기준금리가 가파르게 오르자 발행실적이 문제될 것으로 여겨 아예 딜을 포기한 것이다. 예년 대비 실패로 낙인찍힐 게 두려웠던 현직들이 복지부동한 결과다. 정부가 외평채 금리를 마련해줘야 한국전력이나 수출입은행이 나서고, 뒤이어 그 김치본드를 근거로 대기업들이 외화조달을 시작하는데 기준이 없으니 외화수급은 꼬일 수밖에 없다.
그래놓고도 금융당국은 국내조달 시장이 깨져 민간기업들의 아우성이 터져나오자 고작 한다는 말이 "한전채나 산금채 등 공공기관의 특수채 발행을 축소유도하겠다"는 수준이다. 경제전쟁 시대에 정부는 뒤로 숨어들고, 공기업이나 민간에 돌격앞으로를 외치고 있는 셈이다.
좀비가 되어 가는 민생경제와 금융시장에서 책임감 있는 국가의 존재성은 정말로 이렇게 사라져가는 것인가. 국가는 그날 이태원에서만 실종된 게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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